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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 여성 버스운전자 임미자 씨]"새벽 손님들 희망 실어나를 때 가장 보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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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흔히 버스나 택시를 일컬어 '시민의 발'이라고들 한다. 그건 그것들의 존재가 가지는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강요일 뿐 그걸 밥벌이 수단으로 삼는 운전사 입장에서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하루종일 운전석에 갇혀 긴장해야 하는 고달픈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의 편에서 이들과 관련해 '사명'이니 '봉사'니 하는 주문이 대부분 괜한 말로 그치곤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버스운전사 임미자(林美子·55·여)씨에겐 가당치 않은 얘기다. 그저 운전하는 게 좋고, 수많은 손님을 만나는 걸 즐기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의료기기 제조공장의 책임자로 있는 남편(56)의 벌이만으로도 편히 살 수 있는 그녀가 나이도 그러려니와 남정네들도 힘들다는 운전일을 37년째 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현재 일산 신도시와 서울 신촌을 오가는 77번 버스를 운전하는 그녀는 유난히 새벽을 좋아 한다. 택시로 시작해 가로수를 누벼온 짧지 않은 세월이 안겨준 '부지런 증(症)'이라기보다 하루를 여는 손님들의 희망을 실어 나른다는 기쁨 때문이다. 첫차가 걸리는 날 출발시각은 오전 4시40분-. 집에서 차고까지 10여분 거리지만 남자 동료들과 달리 얼굴이라도 찍어바르느라 한 시간은 서둘러 일어나야 한다.

하루 13시간 운전석에

마감하는 시각도 첫차를 타는 날은 오후 9시40분이지만 막차(첫 출발 기준: 오전 7시40분)땐 자정을 넘겨 오전 1시쯤 된다. 그래서 요즘 같은 동짓달 밤도 그녀에겐 반토막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는 늘 싱싱하다. 자신의 차를 이용하는 손님들과 만나는 또 다른 아침을 기다리는 설렘에서다.

"뭐 버스 운전을 좀 한답시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게 절대 아니에요. 왜 찌뿌드드할 때 새벽 시장에 나가면 절로 살 맛이 느껴지는, 그런 기분을 얘기하는 겁니다. 택시를 할 때와는 또 다른 맛이, 아마 손님을 한꺼번에 여러 분 모시는 까닭이라고 생각해요."

시쳇말로 하면 임씨는 사실 벤처여성이다. 요즘이야 별 것 아니지만 그녀가 핸들을 잡기 시작한 60년대만 해도 보태 말해 운전사는 요즘으로 치면 파일럿에 버금갈 정도의 인기 직업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다. 당시 여성이 처한 사회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직업이란 게 별로 없어 웬만한 남자들도 허겁지겁하고 또래 처녀들이 보릿고개에 배를 곯리다 못해 무작정 상경, 식모살이도 감지덕지로 여기던 시절이 아니던가.

임씨가 핸들을 잡기로 작정한 건 65년 가을 남대문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미국인 여성이 흰색 머플러를 날리면서 '시보레'를 몰고 가는 걸 목격하고 나서다. 경남 김해에서 보낸 초등학교 시절 미군 차량이 내뿜는 배기가스가 하도 구수해 코를 들이대곤 했던 추억을 잊지못한 채 차량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빠져 지내오던 그녀를 움직이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1남4녀 중 막내인 그녀는 어릴 적 고무줄놀이보다는 남학생들과 씨름을 하며 놀 정도로 원래 말괄량이였다. 난리통에 남편을 잃고 갖은 고생을 하며 5남매를 키우던 어머니는 막내가 운전을 배우겠다고 하자 "사내들도 위험한 일을 왜 하려느냐"며 극구 말렸지만 당시 미군부대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하던 셋째 언니를 졸라 무조건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당시 월급이래야 고작 2만∼3만원이었지만 일단 맘먹으면 막무가내인 막내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탓에 언니는 매월 1천5백원하는 학원비를 흔쾌히 대줬다.

이윽고 6개월 뒤인 66년 3월 초 서울 한남동 운전면허시험장-. 1백66명의 학원동기생들과 함께 실기 테스트를 받으러 간 임씨는 동료들이 줄줄이 떨어지는 걸 보고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이야 오토니, 스틱이니 자신이 원하는 차종을 선택해 할 수 있지만 당시 학원에선 미군에서 불하받은 '스리쿼터'로 연습을 하고 정작 시험은 다 낡은 새나라 택시로 치러야 했기 때문. 하지만 타고난 감각 덕분인지 임씨는 무사히 코스를 통과했고 시험장 안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떠나갈 듯했다. 이날 응시하러 간 학원동기 중 합격자는 임씨와 남자 두명 등 단 세명뿐이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요즘이야 손발만 꼬무락거릴 줄 알면 운전쯤이야 다하는 세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어림도 없었어요. 멀쩡한 대장부들도 운전하면 대단한 기술로 알던 시절에 더구나 열아홉 처녀가 운전면허를 땄다고 생각해 봐요. 저의 면허 번호가 '46612'였는데 여성으론 대한민국 사상 통산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인가 그랬거든요."

면허는 땄지만 정작 취업이 어려웠다. 새파란 처녀가 운전을 하겠다니 전혀 미더워하질 않았다. 애걸복걸하며 돌아다닌지 서너달 만에 어렵사리 마포에 있는 한 택시회사에 취직했지만 대우는 마찬가지였다. 택시라고 해야 시발·새나라에 이어 당시 코로나가 막 선뵈던 때였는데 새나라 다음으로 '신성호'란 게 있었다. 드럼통을 두드려 만들었다고 해야 할 정도로 '왕고물'이라 고장이 잦아 반짝 얼굴만 내밀었다 단종(斷種)된 차다. 멀쩡한 택시들은 남자들에게 고참순으로 맡기고 그녀에겐 이놈의 고물딱지를 맡기니 가뜩이나 '초짜'인 판에 버벅거릴 수밖에. 십리는 고사하고 10m도 못가서 주저앉곤 하면 모두 책임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첫 직장이지만 한달 만에 때려치웠다. 그리고 두 회사를 더 옮겨다녔다. 이러는 사이 어느덧 운전실력도 늘어 어느새 그녀에겐 '쌕쌕이'란 별명까지 붙었고, 가는 곳마다 인기였다. 전차에 가로막혀 기다리고 있노라면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차를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혹 교통법규를 위반해 경찰에 걸려도 눈감아주기 일쑤여서 딱지 한번 떼이질 않았다.

임씨가 운전에 푹 빠져들자 이듬해 초 어머니는 남의 차를 모는 막내가 안쓰러웠던지 1백만원을 들여 코로나 택시를 한대 사주며 "이왕 시작했으니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했다. 시집가 장사를 크게 하고 있던 큰언니한테 융통하는 식이었지만 쌀 2백50가마도 더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당시엔 아직 개인택시가 없던 시절이라 기존 택시회사에 지입차주 형식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그녀의 차는 '국산택시 365호'. 신이 났다. 쉬지 않고 일해도 힘이 들지 않았다. 돈벌이도 잘 돼 3년 만에 택시를 네대로 불렸다. 어머니도 나서 기사들의 밥을 해주며 뒷바라지를 해줬다. 이제 한대만 더 있으면 정식으로 사업자등록을 하고 택시회사 사장이 될 참이었다. 얄궂은 게 운명이라든가. 69년도 저물어가던 초겨울 어느 날 그녀 소유의 택시가 구름다리 아래로 무단횡단하던 화가를 치어 숨지게 하는 사고를 내고 말았다.

"보험도 없던 때라 택시 두대가 사고 처리비용으로 날라갑디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자책감에 만 정이 떨어져 아예 핸들을 놓기로 맘먹었죠."

77년 여성 첫 개인택시

하지만 운전에 대한 매력과 365호를 버릴 수가 없었던 그녀는 그 뒤로도 택시를 계속 몰았고, 드디어 77년 서울시가 10년 무사고 운전자를 대상으로 처음으로 개인택시면허를 내주면서 3백명 가운데 홍일점으로 발대식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임씨가 버스운전을 시작한 건 82년부터. 개인택시를 하던 78년 결혼한 그녀는 남편이 81년 사업에 망하자 어쩔 수 없이 차를 팔고 다시 회사택시를 시도했으나 이내 사납금 갈등이 없는 버스로 방향을 바꾼 것. 우이동에 있는 8번 버스(동부운수)를 시작으로 김포교통·강화운수를 거쳐 지지난해부터 지금의 명성운수에서 일하고 있다.

요즘 그녀의 근무시간은 대략 하루 16시간씩 월 20일 정도. 운행코스인 일산신도시~신촌~일산신도시를 한바퀴 도는 데 2시간10분쯤 걸리는 것을 하루 여섯 탕을 해야 하니까 운전석에 갇혀 있는 시간만 꼬박 13시간이다. 같은 노선을 뛰는 운전기사들 가운데 유일한 여기사지만 남자동료들과 모든 조건이 똑같다.

운전경력은 물론 나이로 쳐도 왕고참 축에 끼기 때문에 오히려 후배 기사들의 어려움을 다독거리는 입장이다. 그래서 후배들사이에 '누나'로 통한다. 일의 성격상 워낙 긴장되고 따분하다 보니 동료들끼리도 배차문제 등으로 곧잘 다투곤하는데 이때마다 '누나'의 손길이 스치면 대부분 눈 녹듯이 문제가 풀리곤 한다.

운전사들에겐 뭐니뭐니 해도 가장 어려운 게 천차만별인 손님들 비위 맞추기. 하지만 그녀의 해법은 간단하다.

"요즘은 한결 나아졌지만 예전엔 특히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차가 조금만 늦어도 욕을 해대며 돈을 집어던지는 행패가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그러려니 싶어 꾹 참았다가 내릴 때 잘 가라고 인사를 하면 십중팔구 다음에 탈 땐 먼저 인사를 하곤 합니다. 후배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누나는 신이냐'며 빈정대면서도 대부분 속으론 끄덕거립니다."

임씨는 요즘 들어 남편과 두 딸로부터 "그만 쉬라"는 강권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대답은 "놀면 뭐하냐"다. 그녀는 지금껏 감기 한번 걸린 적이 없다. 손님들한테 좋은 기(氣)를 듬뿍 받은 덕분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정년(58세)까지는 물론 사정이 허락하면 촉탁으로라도 계속 핸들을 잡을 각오다. 보은을 위해서라도-.

이만훈 사회전문기자

mh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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