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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용후 핵연료봉'봉인제거파문]"美, 核 재처리하면 선전포고 간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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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이 핵 문제와 관련해 한계선(Red Line) 일보 직전까지 발걸음을 내디뎠다. 21일 5㎿e원자로의 봉인을 제거한 데 이어 이틀 만에 핵무기 5∼6개 분량의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한 사용후 핵연료봉(8천여개)과 핵재처리 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의 봉인마저 없앴다. 한·미·일 3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원상 회복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위기의 수위를 한 단계씩 높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용후 핵연료봉이나 방사화학실험실은 북한이 지난 12일 핵 동결 해제 발표 때 내세운 전력 생산과는 거리가 멀어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북한이 만약 밀봉(密封)된 사용후 핵연료봉을 방사화학실험실로 옮겨 플루토늄 추출 작업에 들어가면 핵 문제는 돌이키기 어려운 사태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이 작업은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카드라기보다 핵무기 개발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사용후 핵연료봉 밀봉 해체 작업이나 방사화학실험실 재가동에 들어가면 미국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핵무기 개발 수순 돌입 지적도=북한이 초강수를 두는 의도에 대한 전문가 시각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는 대미 협상용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이 대이라크 개전의 초읽기에 들어가고 한국이 정권 교체기를 맞아 제대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해 유리한 협상 고지를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북한의 위기 조성 전략은 미국과 협상을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북한은 북·미 간에 새로운 합의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두번째는 핵무기 개발을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핵무기 선제 공격도 가능하도록 전략을 바꾼 만큼 이에 맞설 카드는 핵무기 개발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북한의 일련의 움직임은 핵무기 개발을 통해 북한 체제를 지켜나가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세번째는 북한 체제 내부의 결속을 위한 고육지계의 색채도 있다는 풀이다. 북한 지도부의 정책 판단 잘못으로 내부의 불만이 커지면서 체제 결속을 위해 위기를 조성하게 됐다는 것이다. 북한 지도부는 일본인 납치 및 핵 개발 시인을 통한 '고백 외교'에 나섰지만 이것이 실패하면서 개혁·개방 정책은 뒤뚱거렸고, 주민들의 불만도 적잖은 것으로 알려졌다.

◇핵 재처리 강행 여부가 갈림길=한·미·일 3국은 북한의 사용후 핵연료봉과 방사화학실험실 봉인 제거에 대해 여전히 외교적 해결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중·러와 북·일, 남북 대화 채널을 통해 북한에 원상회복 압박만 가하고 있을 뿐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미국이 현실적으로 중동과 아시아에서 2개 '전선'을 동시에 가져가기 어려운 사정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사용후 핵연료봉의 밀봉을 뜯고 플루토늄 추출을 위한 재처리 작업에 들어가면 마냥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개전과 관계없이 대북 경제 제재나 군사적 압박 카드를 빼들지도 모른다.

오영환 기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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