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핵카드 빈말 아니다" 美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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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북한이 영변의 5㎿e원자로에 설치된 봉인과 감시카메라를 제거함으로써 북한 핵 문제가 중대 국면을 맞게 됐다. 지난 1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밝힌 핵 시설 재가동의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의 이번 조치는 북·미 제네바 합의는 물론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북한 간 핵안전조치 협정까지 어겼다는 점에서 큰 파장이 예상된다. 5㎿e원자로 내 봉인은 제네바 합의 의무사항이지만, 감시카메라 설치는 핵안전조치협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 양국은 북한의 원상 회복을 위한 외교적 압박을 강화하고 있지만 북한이 '핵 카드'를 접을지는 미지수다. 한·미·일 3국과 유럽연합(EU)이 북한의 이번 조치에 맞서 대북 경수로 지원 공사를 중단하면 한반도 정세는 난기류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의미=북한의 5㎿e원자로 내 봉인·감시카메라 제거는 5MWe원자로의 재가동이 시간문제임을 뜻한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원자로 가동 여부를 검증할 봉인·감시카메라를 제거한 만큼 원자로를 재가동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북한의 5㎿e원자로 재가동이 핵무기 개발 수순에 돌입한 것으로 단정키는 어렵다.

북한이 이번 조치가 미국의 중유 지원 중단에 따라 전력 생산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데다 사용 후 연료봉에 대한 봉인과 재처리 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재처리시설)의 봉인은 손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이 이들 봉인마저 제거하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도가 명백해지면서 핵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질 수 있다.

◇의도=북한의 이번 조치는 대미(對美)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벼랑끝 전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5㎿e원자로의 감시장비만 제거한 것이나 관영 매체들이 이번 조치가 전력 생산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은 전면적인 핵위기보다는 대미 협상에 초점을 맞춘 것임을 시사한다.

북한이 비교적 빠르게 긴장을 고조시키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점은 대 이라크 전쟁준비로 북한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는 미 정부에 협상을 서두르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북한은 대내적으로 "제2 고난의 행군길을 헤쳐 나가야 할 수도 있다"고 주민들에게 대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과의 대립국면이 장기화되더라도 북한이 미국의 의도대로 끌려가지는 않겠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한 조치다.

◇전망=북한의 이번 조치에 따른 대응은 앞으로 두 차원에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대북 경수로 공사 중지이고, 다른 하나는 IAEA의 대북 조치다. 한·미·일·EU는 조만간 대북 경수로 공사 중지를 논의하게 될 것이며, IAEA는 북한 핵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갈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북·미 간에 해법의 접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북한은 대미(對美) 협상을 위한 압박의 수위를 올리고 있지만 "나쁜 행동은 보상받지 못한다"며 북한과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입장이 변할 가능성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오영환 기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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