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무사고 여성운전 원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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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은빛 머리에 70대의 나이를 잊을 정도로 활기찬 정광모(사진) 한국소비자연맹 회장은 우리나라 소비자 운동의 거목이자 여성 운전자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자동차와 인연을 맺은 지는 반세기가 넘었다. 정회장이 운전면허를 딴 것은 평화신문 기자로 활약하던 1951년 10월이지만, 자동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화여고 시절부터였다.

수원이 집이었던 정회장은 40년대 말 이화여고에 다닐 때 수원역에서 기차통학을 했는데, 기차를 놓친 날에는 경수국도에 나와 트럭을 얻어 탈 만큼 활달했다. 그 때마다 운전사에게 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가끔은 운전사들을 졸라 직접 운전대를 잡기도 했다. 당시에는 숯을 피워 달리는 목탄차들이 많이 있었는데, 대개 고물에 기계식이라 운전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이 때문에 정회장은 자신의 운전을 '목탄차 운전 솜씨'라고 자랑하곤 한다.

그녀는 "이화여고를 졸업하던 49년, 소녀 때 꿈이었던 여성 파일럿이 되기 위해 잠시 항공부대에 입대했을 동안 배운 조종·통신·정비 등이 뒷날 자동차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회상했다.

이렇게 익힌 운전솜씨로 면허를 따기 반년 전인 51년 봄의 일. 평화신문 기자이던 그녀는 신문발송 트럭을 타고 출입처로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그 트럭 운전사가 다른 운전사와 싸움을 하다 차를 버리고 가버렸다. 할 수 없이 정기자는 역에서 직접 트럭을 몰고 인현동 신문사까지 돌아와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일보 정치부 차장으로 있던 68년,소비자 보호운동을 하는 일본 여기자단을 만난 것을 계기로 소비자보호운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정회장은 80년 30년 간의 기자생활을 마감하고 본격적인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학생회 대대장과 체육부장을 지낼 만큼 보스 기질이 많았지만 실생활에서는 상당히 꼼꼼하고 실리적이다. 이런 성격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보면 잘 나타난다. 차를 치장하고 꾸미는 것을 싫어하고 간단한 일상점검은 직접 한다.

정회장의 첫 차는 52년 2년치 월급과 맞먹는 2백30만환을 주고 구입한 '포드 커스텀'이었다. 그 뒤 55년에 나온 최초의 국산차 '시발'을 비롯해 새나라·코로나 등 안 타본 국산 차가 없을 만큼 국산차 애호가가 됐다.

정회장은 오랜 운전경력을 자랑하면서도 섬세하고 치밀한 운전 감각 때문에 그 동안 작은 사고 한번 안냈다고 한다. 정회장의 운전습관 중 하나는 절대 경적을 울리지 않는 것이다. 소음이 싫은 데다 행인에게 피해를 주기 싫기 때문이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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