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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역사물에 눈 돌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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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지난해 김성수 감독의 야심작 '무사'는 여러 모로 아쉬움이 컸다. 한국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주목됐으나 극장의 반응은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영화적 완성도가 기대만큼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 공장' 할리우드가 대하사극 제작에 대대적으로 나선다는 소식은 부럽다. 2년 전 히트했던 '글래디에이터'의 후폭풍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향후 2∼3년간 과거의 세계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영웅과 대전투를 되짚어보는 서사 액션극이 10여편 이상 만들어질 예정이다. 이들 역사물은 '스타워즈 에피소드''마이너리트 리포트' 등 SF영화나 '해리포터''반지의 제왕' 등 팬터지 액션의 뒤를 이어 할리우드의 '주류'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할리우드가 역사물에 눈길을 돌린 건 거의 40년 만의 일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클레오파트라'(1963년) 이래 거의 맥이 끊겼던 역사물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요즘 할리우드는 '벤허'(59년) '스타르타쿠스'(60년) '아라비아의 로렌스'(62년) 등이 쏟아졌던 196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파란만장한 일생에는 세 편의 영화가 달려들고 있다. 감독들도 쟁쟁하다. 니콜 키드먼 주연의 '물랭루주'를 만든 바즈 루어먼 감독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끌어들이며 2004년 개봉을 노리고 있다. '플래툰'의 올리버 스톤과 '택시 드라이버'의 마틴 스코시즈 등 거장들도 알렉산더에 매달려 있다.

또 '퍼펙트 스톰'을 연출했던 볼프강 페터젠 감독이 호머의 고전 『일리아드』를 각색한 '트로이'를 2004년 여름 개봉 목표로 만들고 있다. '트리블 X'의 신세대 액션 스타 빈 디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군을 무찔렀던 고대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을 그린 '한니발'(내년 봄 크랭크인)에 출연할 예정이다. 기원 전(BC) 4백80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치열한 싸움이었던 테르모필레 전투를 다룬 영화도 유니버설과 20세기 폭스에서 각각 준비 중이다.

근대사를 담은 액션극 제작도 활발하다. 19세기 후반 뉴욕을 배경으로 한 '갱스 오브 뉴욕'(감독 마틴 스코시즈)이 이미 완성돼 20일 미국에서 개봉된다. '글래디에이터'의 스타 러셀 크로는 프랑스 나폴레옹 시대를 조명할 '매스터 앤드 커맨더'에 전념하고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세 편도 내년 초부터 줄줄이 선보인다. 로버트 듀발·주드 로·톰 크루즈 등 톱스타가 각각 주연을 맡은 작품은 '신과 장군''차가운 산''마지막 사무라이'다.

할리우드의 '과거 회귀'는 최근의 팬터지 열풍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갈수록 불안해지는 시대를 헤쳐나가는 모형을 신화라는 상상의 공간이 아닌, 역사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다. 특히 2년 전 오스카상을 휩쓸며 전 세계 흥행 수입 4억6천만달러를 기록한 '글래디에이터'가 기폭제가 됐다. 미국 일간지 USA 투데이는 "'브레이브 하트'(95년), '패트리어트'(2000년)등 서사영화가 종종 제작됐으나 요즘처럼 유행 비슷하게 쏟아져 나오는 건 새로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수천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대규모 군중 신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어렵지 않게 재현할 수 있을 만큼 발달된 기술, DVD가 급속하게 퍼지며 비약적으로 확대된 영화 시장 등도 제작비가 많이 투여되는 서사극의 르네상스를 촉진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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