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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키워드로본2002여성계]월드컵 女風… 보톡스 熱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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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보톡스 / 눈 떨림 치료에 쓰이던 근육 마비 주사약 이름이 1년만에 보통명사가 됐다. 주사 한 방이면 눈가의 주름이 사라지고 턱이 갸름해진다는 유혹에 숱한 여성이 넘어갔다. 이제 성형은 화장을 고치듯 쉽고 간편해졌다. 성형 전문의뿐만 아니라 산부인과·이비인후과 등에서도 보톡스 주사를 놓는다. 한국에서만 올해 7백억원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반년마다 주사를 맞아야 하니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인 셈이다. 서울 노블성형외과 고익수 원장은 "지금은 종아리를 가늘게 하거나 코를 세우는 데도 보톡스가 이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홈쇼핑 / 발품을 팔던 시대는 지났다. '손품'의 세상이다. 주부들은 안방의 TV 앞에 앉아, 직장여성은 사무실 컴퓨터를 살피며 '가게'(Shop)를 돌아다녔다. 올 상반기 한 홈쇼핑 업체가 롯데백화점 본점 매출을 앞질렀다. 현재 국내 TV 홈쇼핑 업체는 5곳. 유사 홈쇼핑 업체는 1백개가 넘고 인터넷 쇼핑몰은 하늘의 별만큼 많다. 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홈쇼핑 고객의 80%가 여성이다. 전체 고객의 52%가 주부다. 상품도 의류·잡화·가전제품·보석 등 여성적인 품목이 대다수다. 예쁜 종아리를 만들어 준다는 '세븐라이너 슬림'이란 제품은 홈쇼핑에서 올해 2백억원어치가 팔렸다.

장상 / 7월31일. 정부종합청사를 걸어나오는 한 중년 여성의 모습은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였다. 여성으로서 헌정사상 최초로 국무총리 업무를 맡았던 장상 전 이대총장. 그러나 서리 딱지를 떼지 못하고 3주만에 물러났다. 사상 첫 인사청문회에서 아들 국적 문제·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국회의 임명동의를 받지 못했다. 답변 태도도 구설에 올랐다. 공인으로서의 흠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권의 당리당략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는 것 또한 부정하기 힘들다. 여성의 공직 진출 정도를 측정하는 여성권한척도(GEM) 세계 61위의 나라에서 장상 총리 인준 부결은 여전히 아픈 기억이다.

명품 / 루이뷔통 핸드백·구찌 가죽재킷·페라가모 구두·불가리 시계…. 칠성사이다·럭키 치약처럼 어느새 친숙해진 어휘들이다. 명품 시장은 해마다 20% 이상 급성장 중이다. 백화점 명품 고객의 90%가 여성이다. 명품 판매량의 절반이 핸드백이다. 루이뷔통·구찌·프라다 등 가방 브랜드가 한국에선 최고 인기다. '20대 명품족' 운운하더니 이젠 청소년 사이에서도 '명품계(契)'가 인기란다. 원래 명품은 예술작품을 일컫는다. 하지만 한국의 명품 열풍은 '브랜드'에 집착한 그릇된 소비 행태에 가깝다. 유독 핸드백이 잘 팔리는 이유는 상표가 가장 잘 보이는 품목이기 때문이란다.

대치동 / 서울의 탄천과 양재천을 끼고 있어 한 세대 전까지 해마다 물에 잠겼던 갈대밭 한티마을. 이 불모지가 올해 가장 유명한 땅이 됐다. 한티마을의 한자식 표현인 '대치(大峙)동'은 올 한해 '21세기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현장이자 '부동산 값 폭등'의 진원지다. 대치동은 아이를 위해서라면 물불도 가리지 않는 한국의 아줌마가 만든 사회현상이다. 현재 이곳엔 5백여개의 입시학원이 성업중이다. 수학 한 과목만 가르치는 과목별 전문학원을 넘어서 도형·함수 전문 등으로 세분화됐다는 게 대치동 학원가의 특징이다. 31평형 아파트에서 사는 한 주부는 "1년새 3억원이 뛰었다"고 전했다.

1.3 / 한국여성이 '출산 파업'을 했다. 아이 낳기를 거부한 것이다. 지난해 한국의 출산율은 1.3명(15~49세 임신 가능 여성이 평생 가지는 자녀수)에 그쳤다. 이를 놓고 일부는 자신의 삶에 더욱 충실하려는 의식의 변화라고 해석했지만 굳이 한국에서만 이런 의식이 팽배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애를 키우기 힘든 사회구조적 여건 탓이라는 설명이 유력하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급증하면서 출산율 또한 곤두박질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보육과 직업을 병행하는 건 여전히 버겁다.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 대선 후보들도 출산휴가·육아휴직 확대, 보육시설 확충 등을 약속했다.

월드컵 / '축구'의 성(性)은 원래 남성이었다.'군대 가서 한 축구 얘기'는 여성 앞에서 죄악이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선수들이 죽기 살기로 공을 쫓아다니는 단순·무식한 스포츠'가 축구였다. 하지만 '2002 한국 월드컵'의 성은 분명 여성이었다. 길거리 응원의 70%가 여성이었다. 길거리에 나선 여성들은 자유분방했고 망측했다.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를 스포츠 브라·스카프·탱크탑·치마로 만들어 입고 나왔다. 김남일·안정환은 '날라리' '꽃미남'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올 6월 한국의 여성은 여전사의 모습이었다. 당당하여라∼ 붉은 여전사.

2002년이 며칠 안 남았다. 올해도 한국은 시끄러웠고 바빴다. 여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저 수준인 1.3의 출산율을 기록해 사회에 쇼크를 주더니 태극기를 휘감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얼굴에 보톡스 주사를 맞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루이뷔통 핸드백을 샀다. 2002년 한국 여성의 족적을 7가지 키워드로 재구성해봤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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