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동맹관계 흔들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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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기온이 영하 8도까지 떨어진 어제 아침,미국 대사관 주변과 내부는 조용했다.8층 대사실에서 국무부의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의 서울 도착을 몇 시간 앞두고 토머스 허버드 대사 주재로 간부회의가 열리고 있는 것이 정상이 아닌 데로 흘러가는 한·미관계를 반영했다고 할까.

허버드 대사는 자신의 답변이 정확하게 인용될 것인지에 신경을 크게 쓰면서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을 다시 고치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양주군 여중생 사망사건에 직접 사과하라는 시민단체와 정치권, 일부 대학교수의 요구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허버드 대사는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은 미국이 일본과 독일을 포함한 85개국들과 체결한 협정과 완전히 동일하다(fully equal)고 전제하고, 협정의 내용을 다시 고칠 여지는 없다고 말했다. 사과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부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아주 깊은 유감의 뜻과 사과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사과를 했습니다.한국 국민도 그것을 부시 대통령의 매우 진지한 유감표명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때로는 촛불시위,때로는 과격한 시위를 하면서 미국에 요구하는 것이 바로 주둔군 지위협정의 개정과 부시 대통령의 직접 사과인 것을 생각하면 미국 정부의 입장과 한국 시민의 입장은 너무 거리가 멀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주둔군 지위협정의 개정이 아니라 개선을 지시한 것은 한국 정부도 지난해에 개정한 협정을 다시 개정할 여지는 없다는 데 미국과 입장을 같이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이 문제에 관한한 시민단체들과 정부의 입장도 상반된다.

반미시위는 초등학생들이 두 명의 미군에 대한 재판을 다시하라고 요구하는 혈서를 쓰고, 대학교수들이 성명을 내는데까지 확산됐다. 대선 후보들도 각자의 계산과 방식에 따라 반미시위를 득표에 활용하려 한다. 특히 이회창(李會昌)후보는 협정의 즉각 개정과 부시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강도 높게 요구하면서 국민서약서에 서명까지 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은 미국 정부가 李후보의 그런 행태를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보고를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단체 회원들의 백악관 앞 시위는 미국인들에게도 한·미관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알린 사건이다. 허버드 대사에게 한국의 반미시위에 대한 미국 여론의 반응을 물었다. "미국 군인들이 살인자로 묘사되는 것을 보고, 또 시위하는 사람들의 일부 주장을 듣는 것이 미국인들에게는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

한국의 반미 정서와 시위가 이대로 확산되면 조만간 미군 물러가라는 구호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미 민노당의 권영길(權永吉)후보는 미국을 향해 주둔군 지위협정을 개정하든지, 개정하지 않으려거든 미군을 철수하라고 요구한다. 이대로 가면 우리도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미군 철수론에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남북 정상회담과 여러 차례의 남북 회담들을 목격하고 금강산을 다녀온 많은 한국인은 부시 정부가 쏟아내는 북한 핵위협론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도발로 남북한이 다시 전쟁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미군 물러가라고 외치는 데까지 발전할지도 모르는 반미시위가 확산되는 것도 그런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잊지 말자. 정상회담을 포함한 남북대화와 금강산 관광을 포함한 남북교류가 가능한 것은 한·미동맹이라는 든든한 안보 울타리가 있기 때문임을. 지금은 한·미 동맹관계를 흔들 때가 아니다.

휴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체제가 만들어지면 그러지말라고 해도 주한미군의 규모를 줄이거나 재배치 또는 철수하는 문제가 공론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의 주둔군 지위협정은 긴 협상끝에 개정된 것이다. 마침 정권도 바뀐다. 李후보는 협정의 개정을 공약했고, 盧후보는 처음부터 한·미관계의 현상에 비판적이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는 협정의 운용방식 개선에 의욕을 보이는 두 나라 정부의 노력을 지켜보자. 미국이 미군의 한국 주둔을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한국도 미군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반미시위와 철군요구 사이에는 충분한 안전거리를 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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