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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걸(中): "접대 못한다" 폭행… 강제 낙태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한국을 성(性)노예를 방치하는 나라로 기억할 겁니다. "

지난달 말 인천국제공항. 필리핀 여성 마리아(가명·27)가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인권침해를 고려해 이하 외국 여성의 이름도 모두 가명으로 적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지난해 12월. 공장에서 받는 일당 3달러로 가족 8명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 "월 6백달러(약 70만원)를 받는 웨이트리스로 취직시켜 주겠다"는 필리핀 현지 브로커의 제안은 거절할 수 없는 '코리안 드림'이었다. 그러나 꿈은 꿈으로 끝났다.

마리아는 한국에서 11개월 동안 미군 전용 클럽 3곳에 댄서로 팔려다녔다. 매춘을 강요당해 몇번을 도망쳤다가 붙잡혔다고 한다. 클럽 업주들은 "기획사에 줬다""통장에 넣어 한꺼번에 주겠다" 는 등의 핑계를 들어 월급도 떼먹었다. 한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겨우 구조된 마리아가 손에 쥔 돈은 2백50만원뿐. 그나마도 강제 출국을 감수하고 자진 신고했기 때문에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대신 받아준 것이었다.

1998년 예술흥행(E6) 비자 발급을 완화한 이후 국내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외국 여성이 급증하면서 인권침해가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의 끊임없는 문제 제기에도 정부는 얼마 전까지 기본적인 인권침해 실태조차 파악하지 않고 있다.

지난 10월 주한 필리핀 대사관이 감금 윤락을 강요당한 자국 여성들을 대신해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 방침을 밝히고 외국 시사주간지에 미군 기지촌의 인권침해 사례가 보도되면서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경찰청은 지난 10월 처음으로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외국 여성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집중 단속을 벌였다. 그 결과 폭행·협박·감금·인신매매 등을 저지른 33명을 적발, 이 중 20명을 구속했다. 지금도 전국의 외국인 근로자 지원센터와 여성 쉼터 등에는 피해 여성들의 구조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남 거제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던 알렉산드라(24·러시아)는 여권을 빼앗긴 채 성매매를 강요당한 경우다. 그는 손님 접대를 제대로 못한다는 이유로 업주에게 폭행당해 전치 2주의 상처를 입었다. 병원 입원기간을 포함해 몇달치 월급을 전혀 못받았다.

적지않은 여성들은 정신적·육체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한국을 떠난다.

필리핀인 레나(27)는 미군 전용 클럽에서 손님과 성관계를 했다가 임신되자 강제로 낙태수술까지 받는 수모를 겪었다. 그가 있던 경기도의 A클럽 주인은 "종교(천주교)상의 이유로 낙태를 받을 수 없다"는 레나의 애원도 무시한 채 수술을 받게 했고, 수술 후 1주일 만에 다시 윤락을 시켰다. 그는 낙태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업소에서 쫓겨난 뒤에야 최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인 옥사나(29)는 출국하기 전까지 댄서로 일했던 나이트클럽 사장과 소속 연예기획사 대표 등에게 수차례 성폭행·추행을 당했다. 도착한 날부터 클럽 사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그는 심각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다.

피해 여성들은 우리 정부에 제대로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현행 출입국관리법에 따르면 성매매가 강제 출국 사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국제적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서 법무부는 최근 방침을 바꿔 체류기한이 남은 상태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여성에 대해선 강제 출국을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피해자가 구제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한 필리핀 대사관에 따르면 지난 10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일제조사 때 감금 윤락 등 인권침해를 호소했던 엘레나(24) 등 4명은 이틀 만에 강제 출국당했다.

국제이주기구 고현웅 한국사무소장은 "인터걸 유입은 유럽·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겪고 있는 문제지만, 인권침해는 우리나라가 가장 심각한 수준이어서 국제 NGO들이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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