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명 왜 환원 안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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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갈릴레이는 진자의 운동을 관찰해 단조화진동(Simple harmonic oscillation)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러나 실제의 진자는 단조화진동을 하지 않는다. 완벽한 단조화진동은 마찰이 전혀 없고 진자의 끈이 무한히 길며 끈이 구부러지지 않고 운동의 진폭이 아주 작은 경우에 가능하다. 실제 상황에서 실현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물리학의 기본 내용인 단조화진동은 실제의 진자 운동이 아니라 이를 이상화(Idealization)시킨 것이다. 만유인력의 법칙도 지구나 달과 같은 천체를 완벽한 구형으로 간주하는 이상화의 단계를 거친 것이다.

물리학과 달리 생물학이나 사회과학은 대단히 복잡한 계를 다뤄야 한다. 여러 변수가 현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므로 관심을 갖는 변수 이외의 다른 변수들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관측 자료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 자료를 통계 처리해야 한다. 상황은 복잡하지만 다른 변수를 통제한다는 것은 이상화의 조건을 구성하는 작업이다. 이런 이상화의 과정은 현상의 동인(動因)과 현상 사이의 연관관계를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점에서 이상화의 방법론은 환원주의(Reductionism)와 연관된다. 환원주의는 전체에 대한 설명을 그 요소에 대한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노력이다. 그 결과 가장 낮은 수준의 단계에서 세계를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상위 단계의 요소가 하위 단계의 어떤 요소와 연관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종류의 관계인지를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이상화의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러 변수가 결과에 관련되고, 그 변수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한 영향이 커지게 되면 환원주의의 방법론은 한계에 이르게 된다. 글자 a와 n과 d에 의해 and라는 단어가 구성되지만, and에는 각각의 글자에 없는 '그리고'라는 의미와 관념이 들어 있다. 그것은 각각의 요소가 서로 의지한다는 관계의 맥락, 상호연관의 인연에 의해 하위 요소에 없던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창조적 발현(emergence)의 과정이다. 그러면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의 어떤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대표적 예가 생명세계와 문명이다. 물질이 모여 세포 내 기관을 만들고, 세포를 이루고 계속해 조직과 기관의 단계를 거쳐 개체 생명을 만든다. 다시 그들이 생명세계를 이룬다. 인간의 경우에는 개개의 인간이 모여 사회적 맥락을 형성하고 역사와 문명을 이뤄간다. 이 각각의 단계에서 창조적 발현의 과정이 일어난다. 이 창발의 과정 때문에 사회나 역사나 문화는 개개인의 행위로 환원되지 않고 생명은 세포로 환원되지 않으며 세포는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 사회과학이 생물학으로 환원되지 않고 생물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물리학에서 수소는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 모두 같지만, 지금의 우리는 50년 전의 인류와 다르다. 생물학적으로는 동일해도, 과거의 역사와 문명의 기초 위에서 창발의 과정을 거쳐 오늘의 우리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의미있게 만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나, 새로운 역사,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면서 의미를 가꾸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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