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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설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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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선의 개국 공신 정도전(1342~98)은 왕권이 아닌 신권(臣權) 국가를 꿈꿨다. ‘군주의 정통성은 천명(天命)에 두고 있으며, 그 천명은 백성에 의해 확보되고 유지된다’는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왕권과 대등한 신권을 국가 이념으로 펼치려 했다. 그가 설계하고 이름을 붙인 경복궁은 그런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한다.

경복궁은 광화문-홍례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으로 이어지는 중심 축을 두고 좌우가 대칭적으로 구성된 궁궐이다. 중앙에는 왕과 신하가 국가의식을 치르고 정사를 논하며, 왕이 일상생활을 하는 공간을 배치했다. 동편에는 왕족을 위한 세자궁(동궁)과 대비전(자전)을, 서편에는 신하를 위한 경회루와 수정전을 각각 넣었다. 세종 때 집현전으로 쓰였던 44칸짜리 수정전과 그 바로 뒤에 있는 ‘왕과 신하가 함께 즐기는 연회장’인 경회루는 왕권에 위축되지 않는 신권을 표상하기 위해 건립됐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왕권주의자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의 신권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참수하고, 그의 집을 마구간으로 바꿔버릴 정도로 증오했다. 나아가 정도전의 작품인 경복궁에 맞서 왕의 공간만으로 꾸며진 창덕궁을 지어 왕권을 표현하고자 했다.

정도전의 비참한 말로(末路)는 이방원과의 대립 속에서 불가피한 숙명이었지만 설화(舌禍) 때문이란 얘기가 있다.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빗대 “한(漢) 고조 유방이 (건국 공신) 장자방(장량)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라고 말한 게 명(命)을 단축하는 데 일조했다.

말은 무섭다. 주워담을 수가 없다. 동서고금을 떠나 입을 잘못 놀리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얼마 전 미국에선 전쟁 수행 중인 사령관이 말 하나 잘못 했다가 전격 해임됐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해임한 이래 60여 년 만의 일이란다. “대통령의 빌어먹을 전쟁”이라며 오마바 대통령의 아프간 정책을 비판했던 매크리스털 아프간 주둔군 사령관은 졸지에 군복까지 벗었다.

조현오 경찰청장 내정자가 설화에 시달리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차명계좌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고 했고, 천안함 유족에 대해 “동물처럼 울부짖고”라고 비유했다. 자고로 고관대작이 되려는 사람은 말에 책임을 지는 게 도리다.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의 문이 된다’고 구약성경에서 이미 경고하지 않았나.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