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내 北조치 없으면 2단계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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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한 한·미·일 3국 및 유럽연합(EU)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15일 합의사항은 1단계 대북 보복 조치를 예고하면서 북한의 핵 포기를 압박한 것으로 요약된다.

북한으로 가고 있는 11월분 중유는 지원하되, 북한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12월분 중유부터 공급을 중단키로 한 것이다. 북한에 가해질 '채찍'을 내보이면서 한달 가량의 말미를 준 셈이다.

북한의 새로운 핵 개발 계획이 불거진 이래 3국이 처음으로 구체적 제재 계획과 이에 관한 시한(時限)을 정한 메시지는 적지 않다. 3국은 더 나아가 북한의 태도에 따라 "다른 KEDO 사업도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혀 2단계 조치는 대북 경수로 공사 중지가 될 것임도 내비쳤다.

KEDO의 이번 결정은 한·미·일 간 타협의 산물이다. '12월분부터 중단'이라는 계획표를 낸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미국의 입김이 반영된 것이고, 11월분이 북한으로 가게 된 것은 한·일 양국의 입장이 배려된 것으로 보인다. 시한 설정(미국)과 외교적 노력의 시간벌기(한·일)에서 3국이 절충점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으로선 이라크 개전 준비를 앞두고 중동 쪽에서 흘러나오는 이라크·북한 차별론에 대응할 명분을 얻었고, 한·일 양국은 남북대화나 북·일 간 접촉을 지속하면서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게 됐다.

KEDO의 이번 결정으로 제네바 합의는 큰 손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 북한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 합의는 빈 껍데기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미국의 대북 강경 입장에 미뤄 대북 중유 공급이 기로에 서게 되면서 제네바 합의내용 가운데 지켜지고 있는 것은 북한의 과거핵 동결과 경수로 공사밖에 없게 됐다.

이번 결정으로 북한이 앞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최대 관심사가 됐다. 북한의 반응에 따라 제네바 합의의 장래와 남북, 북·일관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일단 충분한 내부 정리용 시간을 가진 뒤 대응책을 내놓을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한·미·일 3국이 11월분을 보내고 아직 구체적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은 만큼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할 가능성은 작은 것으로 보인다.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도 이달 초 방북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 일행에게 "미국이 중유 제공을 중단하면 제네바 합의가 중지될 것"이라고 밝힌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북한은 일방적 파기에 따른 외교적 부담도 저울질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북한은 이번 결정에 대해 '조건부 파기' 카드를 들고나올 수도 있다.

남북간 철도·도로 연결사업을 비롯한 교류·협력사업이 순항할지도 미지수다. 북한이 남한의 미·일 양국과의 공조를 문제삼을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 정세는 북한이 핵 포기를 통한 북·미 간 일괄타결로 가느냐, 아니면 한·미·일 3국 결정에 대한 북한의 맞대응으로 핵 위기로 가느냐의 갈림길에 선 것으로 보인다.

오영환 기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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