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원고 대신 엉뚱한 논문 게재 국내 학술지에 교포교수 항의서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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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우리 지식사회에서 황당한 해프닝이 하나 벌어졌다.

계간지 '문학과 경계' 가을호(총 6호)가 재일동포 2세인 윤건차(57)일본 가나가와대(神奈川大·한일 근현대 사상사)교수의 글을 실으면서 다른 원고를 게재한 것.

윤교수는 2000년 『현대 한국의 지식 흐름』이란 책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한국 국적으로 처음 일본 국공립대 교수가 돼 주목을 받은 학자다.

윤교수가 이 잡지의 청탁을 받아 '식민지와 천황제'란 제목의 원고를 보낸 것은 지난 7월 15일. 담당 편집위원으로부터 '잘 받았다'는 e-메일 답장까지 받았다.

그런데 정작 실린 글은 '한국,미완의 근대화 프로젝트와 탈근대론'이었다.

이 글은 올 1월 12일 윤교수가 한국의 한 학술회의에서 일본어로 발표했던 논문으로 나중에 새롭게 다듬어 한글로 번역한 글이 계간지 '문화과학' 가을호(총 31호)에 실렸었다.

윤교수는 대리인을 통해 '인격권을 침해받았다'는 내용의 통고서를 '문학과 경계'측에 보냈다. 그리고 "문제가 된 잡지 가을호를 수거해 폐기할 것과 일간지에 사과 광고를 낼 것"을 요구했다.

또 잘못 실린 원고가 '문화과학'에 실렸던 것과 달리 "엉터리로 번역"된 데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문학과 경계'의 이진영 대표는 "윤건차 교수의 학문적 명예를 훼손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면서 "서점에 있는 잡지를 모두 수거하고, '문학과 경계'겨울호에 사과문을 내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을까. 확인해 본 결과 출판사와 윤교수 사이에서 원고 전달을 중계한 편집위원이 e-메일 관리상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윤교수는 "잡지와 관련해 일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연할 따름이다"고도 말했다.

지적소유권 문제를 많이 취급해 온 박성호 변호사는 "매우 희귀한 사례"라면서 "인터넷 시대에 유사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교정을 보는 과정에서 긴장을 늦추면 안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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