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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일본의 ‘무사도 정신’ 은 뻥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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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너희 놈들이 부시도(武士道)에 대해 뭘 알아!”

일본군 포로수용소장 사이토 대령이 영국군 포로들에게 내뱉은 말이다. 작업을 거부하는 영국군 장교들을 사살하려는 장면에선 이런 말도 나온다.

“비무장한 사람을 살해하는 게 일본군의 행동규율(부시도)입니까?”

포로가 된 미국 군의관의 항의다. 이 말에 사이토가 움찔한다. 영화 내내 사이토는 부시도로 무장한 일본 군인으로 묘사된다.

사이토가 보여주려던 부시도는 사무라이, 즉 무사계급의 규율이자 윤리다. 충의, 예절, 용기, 명예, 신의, 검약을 중시한다. 일본인들의 자긍심이 응축된 정신세계로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일본인 특유의 미학으로 포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너무 빠져들진 말자. 그걸 진짜라고 믿는다면 순진하다. 부시도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실체가 아니다. 신화나 상징 조작에 가깝다. 심하게 말해 ‘뻥’이라 할 수도 있다.

부시도를 처음 체계화한 이는 일본의 농학자이자 교육자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1862~1933)다. 미국과 독일에서 수학했고, 미국 여성과 결혼했으며, 국제연맹 사무차장을 지낸 일본 근대의 국제적 지식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그의 초상은 5000엔짜리 지폐에 사용됐다. 그가 1899년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한 책이 『BUSHIDO:The Soul of Japan』이다.

서문엔 집필 동기가 간단히 나온다. 그는 “종교교육을 하지 않는 일본에선 도덕을 어떻게 가르치는가”라는 벨기에 학자의 질문에 답이 궁해진 적이 있었다. 곰곰 생각해 본 결과 그는 일본의 부시도 정신이야말로 일본인의 도덕규범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본에도 제대로 된 도덕과 윤리 체계가 있다, 서양에 기사도가 있듯이 일본엔 부시도가 있다…. 그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책을 썼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서양의 기사도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참고로 어릴 때 어렴풋이 듣던 유교적 덕목이나 사무라이 전설들을 버무려 만든 것이었다. 니토베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는 얘기다. 부시도라는 게 정말 일본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면, 왜 하필 사무라이의 시대가 끝난 뒤에야, 그것도 서양물 먹은 청년의 손으로, 미국에서 영어로 먼저 쓰였겠는가.

그런데 이 책은 나오자마자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인은 모두 부시도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서양인도 많았다. 서양에서 유명해지자 곧 일본어로도 번역됐다. 부시도가 일본에 역수입된 게 바로 그때였다. 그 뒤 부시도는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자기네 고유의 도덕규범이나 미덕으로 각인됐다. 때마침 불어 닥친 군국주의 바람도 집단최면을 거든 듯하다. 이거, 일본에서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굳이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지금도 부시도는 일본인의 의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보수층이 중시한다. 국격을 높이자, 국민의식을 고양시키자, 하는 논의에서 꼭 나오는 게 부시도의 함양이다. 굴절된 자아도취다.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할 때 방위청 간부가 “부시도 나라의 기개를 보여주라”고 훈시한 적도 있다. 코미디다.

니토베는 자신의 책에서 ‘용맹과감한 페어플레이 정신’으로서 ‘의(義)’를 부시도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부시도를 숭상하던 일본 군국주의의 만행을 보면 부시도가 허구였다는 게 잘 드러난다. 지금의 보수우익도 마찬가지다.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사죄에 인색한 그들에게 도대체 부시도의 풍모를 찾을 수 있는가. 원래 없었던 것이니 찾을 수가 없는 거다.

일본의 보수우익은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발표한 담화에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에겐 아직도 아쉬운 내용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자학적 역사관’으로 매도한다. 부시도를 숭앙하는 보수세력일수록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침략을 반성하기보다 패전을 반성한다. 이러니 무사의 체취를 느끼기는커녕 무책임하고 비겁하고 얍삽해 보이는 거다. 부시도를 (말로만) 숭상하는 일본의 보수우익들이여, 니토베의 책은 아예 찢어버려라.

남윤호 경제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