敗將 예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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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무슨 신(神)하고 싸우는 것 같았다. 투수교체나 대타 기용이 기가 막혔다. 오늘도 지는 줄 알았다. 내 평생 이렇게 힘든 경기는 처음이었다."

지난 일요일 저녁, 기어이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김응용 삼성라이온즈 감독이 한 케이블TV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첫마디다. 10일의 6차전을 지켜본 사람들은 金감독의 말이 단지 승자의 아량이나 여유가 아니라는 점을 느낌으로 알 것이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과 LG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전을 거듭했다. 누가 봐도 이번 한국 시리즈는 '삼성 우세'였다. 플레이오프까지 7게임을 더 치르고 올라온 LG는 출전 인원만 같을 뿐 선수 개인의 기량이나 체력 등 절대 전력면에서 절대 열세였다. 김성근 감독은 이런 상황에서 말하자면 게릴라전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막강하기만한 적 삼성을 맞아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손자병법도 아군이 월등히 강하면 적을 포위하거나 정면 공격하되 약할 때는 맞붙지 말고 적의 허점을 노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게릴라전의 요체는 매복과 기습이다. 김성근 감독은 게임마다 가용 투수를 총동원했다. 정규시즌 중에 5명 안팎의 선발투수를 정해 한 게임씩 나눠 맡기던 방식이 아니었다. 경기 흐름에 따라, 상대 타자에 따라 투수들을 매복시키듯 투입했다. '국민타자' 이승엽을 6차전 마지막 타석까지 20타수 2안타에 머물게 한 것은 李선수 본인의 컨디션 탓도 있겠지만, 이같은 매복형 투수기용 덕분이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기습 역시 여러 차례 적중했다. 특히 삼성의 허술한 수비와 주자 견제를 파고든 LG선수들의 과감한 도루는 2, 5차전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5차전 7 대 4로 리드를 잡은 8회에도 번트로 1점을 추가한 공격 역시 승리로 이어진 기습이었다. 고관절 부상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타자(김재현)를 6차전에 대타로 기용해서 2타점 적시타를 끌어낸 것도 기습적인 선수기용이었다.

김응용 감독의 '패장(敗將) 예찬'은 직선적이고 투박하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사막의 여우' 로멜을 가리켜 "우리 앞에는 지극히 용감하고 교묘한 장군이 있다. 그는 위대한 장군이다"고 했던 처칠 영국 총리의 적장 예찬만한 격조는 없다. 그렇지만 이 기막힌 시리즈를 지켜본 전문가나 팬들의 공감을 사기에는 충분하다. 빛나는 조연이 있을 때 주연은 더욱 돋보인다. 한번 생각해보자. LG의 선전이 없었다면 삼성의 우승이 이처럼 빛났겠는가.

손병수 Forbes Korea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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