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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화 뭉쳐야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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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전쟁과 폐허의 국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장편영화가 만들어진다. 거의 2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오는 14일 개막되는 제7회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 열리는 PPP(Pusan Promotion Plan·18∼20일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제작비를 조달할 계획이다.

제목은 '무지개'(감독 세디그 바르마크). 남자의 동행 없이는 여자의 외출을 금지했던 탈레반 정권 시절 집안에 남자가 없는 모녀(母女)의 얘기다.

특기 사항은 이란의 세계적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프로듀서로 전향했다는 점.

2년 전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그렸던 '칸다하르'로 지구촌의 양심을 울렸던 그가 이번엔 아프가니스탄 영화의 재건에 뛰어들었다.

그뿐만 아니다. 올 부산에는 감독이 아닌 프로듀서의 명함을 들고 찾아오는 저명 감독이 많다.

대만의 거장 허우 샤오시엔(侯孝賢)이나 홍콩 영화의 기수 스탠리 콴(關錦鵬) 등이 그렇다. 이들은 영화 기획자와 투자·제작·배급자를 연결해주는 PPP에 참석, 아시아 영화계의 네트워크 구축 가능성을 적극 타진할 예정이다. 세 명의 감독을 e-메일 인터뷰, 아시아 영화계의 오늘을 들었다.

이들이 굳이 PPP에 참석하는 이유는 뭘까.

'비정성시'로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타며 세계 영화계의 거장 대우를 받는 허우 샤오시엔마저 영화를 만들 돈을 조달하기 어려운 걸까.

그는 "대만의 영화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큰 영화 제작을 추진하는 회사가 없다. 제작자는 창의성을 상실했고, 구태의연한 제작과 경영을 맡고 있다. 젊은 감독이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프로듀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1980∼90년대 홍콩 뉴웨이브 영화를 주도했던 스탠리 콴도 "홍콩의 영화산업은 썩은 물과 같다. 감독이든 프로듀서든 상관없이 어떻게 투자자·해외 배급사에게 자신의 프로젝트를 소개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PPP에서 허우 샤오시엔은 80년대 대만의 가요를 모티브로 30분 가량의 단편영화 네 편을 모은 옴니버스식 장편 '내 생애 최고의 날들'(감독 황웬잉 등)을, 스탠리 콴은 결혼식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화가의 아련한 사랑을 담을 '꿈꾸는 풍경'(감독 캐롤 라이)을 소개할 예정이다.

한때 아시아 영화계를 주도했던 대만과 홍콩이 이처럼 주저앉은 이유는 뭘까. 98년 부산영화제에서 '쾌락과 타락'을 출품했던 스탠리 콴의 설명은 명쾌했다.

"홍콩의 영화가 정점에 올랐을 때 감독을 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엔 감독으로서 창의적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이었고, 제작 환경도 좋았다. 하지만 현재 젊은 감독이 지원을 받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가벼운 코미디를 양산한 결과 홍콩 영화에 대한 신뢰가 추락했고, 그 결과 영화계 전반의 활력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단군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올해 시장 자체가 크게 움츠러든 우리 영화계를 꼬집는 듯한 발언이다. 코미디 영화 일색인 요즘의 충무로의 우려를 대변하는 것 같다.

허우 샤오시엔도 "대만의 제작자와 감독간의 협조 체계를 회복하는 게 시급하다. 투자와 배급에 대한 기회가 매우 열악해졌다. 젊은 감독들이 찾아와 문제 해결을 요청하지만 배우 확보나 자금 조달 등에서 무력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영화의 생명인 새로움에 대한 추구, 부단한 실험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다.

마흐말바프는 "다행히 최근 몇년간 이란 영화는 세계 유수 영화제에 진출하며 관심을 받았으나 아직도 국·민영 단체의 지원 없이는 젊은 감독이 활동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이번 프로젝트에선 아프가니스탄 영화 지원에 주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아시아 영화인의 연대에서 미래를 찾았다. 또 그들을 묶는 가교로서의 PPP에 대한 기대가 컸다. 각국의 작은 시장을 겨냥해서는 규모 있는 작품을 기획하기 어렵고, 양질의 영화를 만들어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 개별 국가의 협소한 시장으로 새로운 감독을 지원해주기는 어렵다."(스탠리 콴)

"영화에 관심이 있는 해외 프로듀서들이 아프가니스탄 영화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마흐말바프)

"PPP를 통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앞으로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허우 샤오시엔)

부산영화제와 영화진흥위원회는 이같은 관심과 주장을 털어놓고 돌파구를 모색하는 토론회를 19,20일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갖는다.

아시아 영화계 네트워크(AFN)의 결성을 목표로 10개국 관계자가 참여한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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