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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의 격세지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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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DJ의 장남 김홍일 의원. 그에겐 신체 장애가 있다. 우선 제대로 걸을 수 없다. 혼자서는 세 걸음 정도만 걸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주 넘어진다. 그래서 그의 팔꿈치엔 늘 피딱지와 멍이 있다. 그는 발음도 부정확하다. 열 마디를 하면 반 정도도 알아듣기 어렵다. 정확한 의사소통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의 병명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인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안한다. 주변 사람들은 고문 후유증이라고 한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그는 옥중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조사실 책상에 올라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뛰어내렸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았다. 대신 목을 크게 다쳤다. 그로부터 15년 뒤 그의 몸엔 이 같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는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4년 전 첫 수술은 국내에서 받았다. 척추를 열고 신경을 손대는 대수술이었다. 그러나 별 차도가 없었다. 두번째 수술은 올해 초 미국 UCLA대학에서 받았다. 4개월에 걸친 치료였다. 그러나 역시 눈에 띄게 좋아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절망적인 건 아닌가 보다. 부인 윤혜라씨는 이렇게 말한다.

"바늘구멍만큼씩 좋아지고 있어요. "

그것은 김홍일을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이다. 정치적 생존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그는 DJ의 아들로서 대접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신체 장애도 애써 모른척해 주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는 그를 향한 인사였다. 그러다 보니 그는 왕성한 정치활동을 하는 것처럼 세상에 비쳐졌다. 그것이 그를 각종 비리사건의 단골손님처럼 등장시킨 요인이 됐다.

그러나 이제부턴 다르다. DJ의 후광도 꺼져간다. 개인 김홍일에 대한 대접이 그를 기다린다. 그가 필사적으로 건강을 되찾으려는 이유다. 이미 달라진 세상의 대접을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저녁 약속 장소에 1시간 전에 나온다. 식탁에 엎드려 잠을 잔다. 혼자서 누룽지를 먹고 있기도 한다. 왜 이리 일찍 왔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다. 가있을 데가 없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 그는 보좌관한테 이렇게 푸념했다.

"이번 추석만큼 썰렁한 적은 없었어. 격세지감을 느껴."

야당 때도 이렇진 않았단 것이다. 그때는 가능성이라도 지니고 있었다. 이제는 가능성마저 소진됐다. 탈당 정국 속에서도 그에겐 탈당 제의가 없다. 그렇다고 잔류 요청도 없다. 저절로 중립이 됐다는 측근의 설명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를 괴롭히는 게 있다. "조심하라"는 말만 하고 끊는 괴전화다. 속수무책이란다.

그는 요즘 거의 점심 약속이 없다. 막연히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다 오전 11시를 넘겨 전화기를 돌린다. 그러나 대부분 선약이 있다는 답변이다.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왔던 그들이다. 대신 그는 비서들과 여의도 청국장집을 자주 찾는다.

권력은 꿈과 같다. 깨고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게 권력이다. 그러나 깨기 전엔 그 이치를 모르는 게 또 권력이다. 알았을 땐 떠나가고 없는 게 권력이다. 23년 전 그는 감옥에서 링거 줄을 꼬아 예쁜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것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분노를 삭였다 한다. 그때 분노의 대상은 독재권력이었다. 세상은 그의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가 다르다. 상대가 세상이다. 그래서 더 외로울지도 모르겠다.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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