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년의 고독을 보듬는 속 깊은 사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6면

산간에 눈 내리고 도심에 칼바람 몰아쳐 흔적도 없이 겨울인가 했더니 가을의 절정은 역시 11월이다. 찬비 내린 뒤 환한 햇살인가 했더니 금세 뿌연 바람 불어 다 탄 나뭇잎들 우수수 하염없이 지고 있다.

제 아무리 청춘이라 우겨도 중년일 수밖에 없는 50으로 넘어가는 나이, 도종환(48)씨가 최근 펴낸 여덟번째 시집 『슬픔의 뿌리』에는 가을·중년의 쓸쓸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쓸쓸함마저 이제 깊숙이 감싸안는 속 깊은 사랑도 넘쳐난다.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나리소'전문)

도씨는 죽어 헤어진 아내에 대한 사랑을 사무치게 읊은 『접시꽃 당신』을 1986년 펴내 시집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60만권이나 읽힌 시인이다. 그 와중에 전교조 소속으로 참교육 실천 등 민주화운동을 하다 해직돼 10년 만인 1998년 복직된 교사다. 아내에 대한 사랑도, 제자들에 대한 사랑도, 나아가 세상에 대한 사랑도 다 한가지, '맑고 투명하고 선한'사랑이어야만 세상을 밝히고 감동시킬수 있음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다.

"순결한 남자들/저녁노을같이 붉고 곱던 남자들/그들과 함께 한 시대도 저물어/채울 길 없는 허전함으로 끔찍한 날이 많았다/솔바람 소리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어도/채워지지 않고 파도 소리에 젖어도 젖지 않는/밤들이 많았다/길을 떠나려다 문득문득/순결한 남자들 보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뜨거움도 간절함도 없이 살고 있어서/눈물도 절규도 없이 살고 있어서"('저녁노을'중)

젊은 날 대책 없는 순정함으로 부잣집 털어 가난한 집 도와주려다 잡혀 오랜 옥살이 하다 풀려났으나 금세 죽은 '남민전 전사'김남주 시인 같은 70, 80년대 '순결한 남자들'의 시대는 이제 신화가 됐다. 뜨거움도 간절함도, 눈물도 절규도 없는 이 뜨뜻미지근한 시대, 중년에 순정한 남자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시집에서 도씨는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아니라 그래도 지극한 사랑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순정하고 지극한 사랑을 우리 자연의 친숙한 것들에 빗대어 과장·가식 없이 노래하고 있기에 우리 가슴으로 직접 밀물져 들어오는 것이 도씨 시의 대중적 미덕이다. 나아가 사랑의 첫마음이 우리의 여전한 희망임을 도씨는 노래하고 있다.

"사람들은 늘 바다로 떠날 일을 꿈꾸지만/나는 아무래도 강으로 가야겠다/가없이 넓고 크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버린 것은 아니지만 작고 따뜻한 물소리에서/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다/(중략)/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강 마을로 돌아가/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맑고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돌아가고 싶다"('그리운 강'중)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bacchu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