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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추수할 날들이 남아있기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9면

11월이 왔다. 스웨터의 나프탈렌 냄새와 갓빻은 커피를 싼 종이에서 나는 냄새가 감상적으로 느껴지면 문득 11월이 당도했음을 아프게 알아채는 것이다. 그러나 폐쇄된 버스 정류장이 방치된 거리, 숲속의 허약한 관목, 새들이 메운 회색 하늘, 물방울이 떨어지는 수도꼭지에 깃든 11월은 뭔가 잘못을 추궁하는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북서계절풍이 불어오고 살갗에 우울한 냉기가 감돌면, 중간이 텅 빈 듯한 독특한 자백의 순간들도 함께 찾아오는 것이다. 그건,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를 사로잡는 모호한 무감각을 닮았다.

11월은 한 해 동안 내가 지닌 추억과 상처의 크기를 재어보고, 수많은 악덕과 기쁨을 비교하고, 확보와 상실을 측량하며 빈칸 채우기를 하는 달이다. 어느 11월 밤, 나는 제라늄 화분이 늘어선 어두운 베란다를 쳐다보며 재봉사가 천을 살펴보듯 날짜를 세어보고 있었다. 이윽고 침묵을 부르는 숨소리와 주저하는 손길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한해의 끝에서 추수할 무엇이 있느냐고.

나는 왜 지난 한 해를 방치해버리고 말았을까? 여름 동안엔 왜 그토록 지저분하게 꽃밭을 파헤쳤을까? 왜 아무도 나를 원치 않는 불편한 자리에만 앉아 있었을까? 흔들리지 않은 정확한 걸음으로 헤엄쳐가는 건 그렇게 힘든 일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아무 걱정이 없었을까? 늙어가는 걸 걱정하지도 않았을까? 그러나 참회를 닮은 자책의 한순간 속에서도 나는 문득 지금이 12월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만히 안도하는 것이다. 12월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갑자기 모든 게 글러버린 기분이 들게 하니까. 한 해 동안의 모든 잘못을 고치고 되돌리기엔 너무 시간이 없으니까.

11월은 내가 저지른 그 모든 실수와 악화된 상황을 만회할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고, 그래도 한 달 동안의 유예 기간은 남겨져 있다고, 지금 그렇게 크게 늦어버린 건 아니라고 나에게 일러주는 관대한 목자 같다.

11월엔 부드럽게 풀려 있던 것들이 천천히 응고되기 시작한다. 그 아늑한 추위 속에서 나는 오히려 지난 1년 동안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듯 가슴이 아프면서도 이상하게 온화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별의 운행과 계절의 순환을 이해하는 것보다 내 자신을 이해하는 게 더 힘이 든다는 깨달음은 언제나 더 먼저인 것을.

이충걸 『GQ KOREA』편집장·norway@doo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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