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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중국이 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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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청명이란 음력 4월 5일 청명절, 여기선 태평성세의 뜻이다. 1000여 년 전 북송의 풍속화가 장택단(張擇端)이 수도 변경(卞京)의 도시생활상을 그린 중국의 보물 1호 격 작품이다. 폭 25.5㎝, 가로 길이 5m25㎝에 이르는 그림 속엔 사람이 700여 명, 집 100여 채, 점포 34개, 가축이나 동물 60여 마리, 교량 20여 개, 크고 작은 선박 20여 채가 들어 있다. 이 그림을 첨단 디지털 기술로 700배 확대하고 사람과 동물이 스스로 움직이니 천년 중국의 평화로운 도시생활이 스펙터클처럼 재현된다.

5년 만에 찾은 상하이 푸둥 지구 야경은 참으로 경이롭다. 동방명주(東方明珠)를 둘러싼 현대 건축물의 기하학적 퍼레이드와 구(舊)시가지의 옛 건물이 불균형적 균형을 이루며 기묘한 조화를 빚는다. 강 위엔 유람선이 찬란한 네온사인을 빛내며 흐르고 강 주변엔 수많은 인파가 삼삼오오 담소하며 바람을 쐬고 있다. 버려진 휴지조각도, 고성방가의 음주자도 없다. 낮에 본 청명상하도가 푸둥의 야경과 오버랩되면서 중국이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구나, 아니 과시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온다.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숨기고 어둠을 키운다가 중국의 대외정책 기본이었다. 몸을 낮추고 내실을 키운다는 이 원칙이 언제부터 바뀌었는가.

상하이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반 정도 달리면 우시(無錫)라는 도시가 나온다. 이곳 수출가공구에 하이닉스 중국법인이 있다. 12인치 메모리 반도체를 월 15만 장 생산하고 종업원 35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그 대부분이 현지 중국인을 채용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당초 60만㎡ 공장 부지를 ㎡당 4달러라는 헐값에 50년간 사용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혜택을 주었다. 전력·용수·통신 등 인프라 시설은 지방정부가 설치했다. 여기에 재정 지원도 해서 법인세의 경우 5면(免)5반(半)으로 5년간은 면제고 그후 5년간은 절반만 내면 되는 파격적 우대를 했다. 이 모두가 5년 전 일이다.

우시에서 상하이로 돌아오는 중간쯤에 운하의 도시 쑤저우(蘇州)가 있다. 삼성의 중국 진출은 1985년부터이니 그 역사가 오래다. 이곳 쑤저우공단의 삼성 반도체공장만 25만㎡ 부지에 3200여 명의 중국인 근로자를 채용하고 있다. 중국 삼성 전체의 올해 매출 목표가 492억 달러에 연인원 7만3000여 명의 중국인을 고용할 만큼 거대해졌다. 이곳도 5년 전까지만 해도 우시와 같은 대접받는 투자를 해왔다. 그러나 “지난 5년 사이 중국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싼 임금을 내세운 저임금 생산기지에서 거대한 소비시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중국 하동지역 생산 컴퓨터의 90%가 이 지역에서 소비되고 있습니다.” 쑤저우 삼성공단의 이병철 전무의 말이다. 중국에서 1등 못 하면 세계에서 1등을 못 한다는 게 이젠 상식이 되었다. 삼성 애니콜이 유럽에선 1등이지만 중국에선 노키아에 뒤지니 세계 1등이 못 된다는 얘기다.

이렇게 달라진 환경에서 우리가 중국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약간의 달러를 가졌다고 중국 여행하며 거들먹거리고 장백산에서 만세삼창 하던 시절은 지나간 지 오래다.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차를 사들였다가 기술만 빼먹고 ‘먹튀’했다고 비난한 적 있지만 중국 측으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다. 쌍용차가 대수냐. 볼보자동차를 몽땅 사들인 게 중국이다. 삼성과 LG가 세계 최고 기술을 자랑하는 LCD공장을 중국에 짓겠다고 신청을 낸 지 오래지만 중국 정부에선 가타부타 말이 없다고 한다. 부분도 아닌 전체 공정을 다 옮겨 3조원, 4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데도 말이다. 이렇게 중국이 달라졌다.

거대시장 중국이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면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로선 속수무책이다. 눈치 보며 끌려다니기 바쁠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결국 우리가 소강국으로 살 길은 하이테크 산업을 얼마나 지니고 있고 비장의 성장동력 카드를 어떻게 육성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친(親)서민 정책이라며 대기업 목 조르는 일에 재미 느낄 때가 아니다. 대기업·소기업 가릴 것 없이 앞선 기술이 생존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우리의 미래는 없다.

권영빈 경기문화재단 대표·전 중앙일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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