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새를 털고도 한점 흔들림 없는 삶 "晩秋의 나무, 그를 닮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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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만추(晩秋)의 한기가 뼛속 깊이 파고드는 11월의 초엽. 소설가 박완서(72)씨가 살고 있는 경기도 구리시의 '아치울' 마을은 겨울로 내달리고 있었다. 달력상의 계절은 평등히 네 번 바뀌는데, 경계의 계절인 봄과 가을은 왜 그리도 짧은 것인가. 그러나 가을은 아직 겨울의 목덜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박씨와 함께 집 앞 아차산길을 걸을 때였다.

한 둘 남은 단풍잎이 골바람에 후두둑 떨어져 내리자 산길은 가을 햇살 마냥 포근해졌다. 바람이 불수록 낙엽은 수북이 쌓여, 실연한 여자가 또각구두를 신고 걸어도 발소리와 울음 소리를 잠재워 줄 것만 같았다.

그 곳 아치울에 관한 산문집 『두부』를 펴낸 박씨를 만나러 5일 아차산을 향했다. 『어른노릇 사람노릇』이후 5년 만에 펴낸 산문집에는 그 곳 얘기 외에 월드컵 열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출소일, 우리말에 대한 이중성 등 진지한 소재와 문학평론가 김윤식·화가 고 박수근 등 박씨가 교유한 사람들에 관한 인상기 등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이 산문집의 미덕은 삶의 터전에서 생의 기미를 포착하는 노년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 박씨가 감탄한 아치울의 노을 풍경은 행복하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을 닮아 있었다.

"속은 것처럼,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서럽고 막막해진다. 저녁노을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끝이 어둠이기에 순간의 영광이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집착 없음 때문이다. 인간사의 덧없음과,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아아, 너무도 지엄한 분부…."

마당 정면으로 해넘이 하는 산이 보이고 왼쪽으로 한강물이 바라보이는 그의 집은 몇 발짝만 내디뎌도 서울 사람과 악수할 만한 거리에 있었지만 산속에 포근히 안겨 있는 형세가 마음을 가지런히 모아 놓는 곳이다.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인근의 아파트에서 그 곳으로 이사한 지 4년째, 그는 몸의 건강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오후 9시30분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6시쯤 일어나 앞산을 한두 시간 가량 거니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걷다 다리를 삐고, 넘어져 팔을 다친 최근 2개월여 동안은 앞산 바라보는 일로 대체했다.)

서울 아파트 생활 때의 불면증은 씻은듯이 사라졌고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산길을 올라가다 마주치는 나무들과 인사하는 일이 마냥 즐겁다고 했다.

"살구나무 옆의 올망졸망한 작은 나무들도 흔들림이 없긴 마찬가지다. 한때는 제각기 영화로웠던 나무들이다. 한때의 영화는 속절없이 가버렸고, 속절없이 가버린 것은 나의 군더더기일 뿐 전체는 아니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마지막 남은 전체는 한점 흔들림도 없다. 나무를 닮고 싶다."

노년의 지혜가 빛을 발하고 있지만 이 산문집에는 슬픈 배경이 있다. 그는 "마감에 쫓겨 허둥지둥 사는 일은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는 판단과 함께 대개의 원고 청탁을 사양하고 있었지만 어느 잡지사에서 아치울에 관한 짧은 글을 써달라는 청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의 글에 그림을 그린 이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아치울로 이사온 화가 손혜경씨였다. 박씨의 딸뻘인 손씨는 지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나를 위해 나는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갖는 게 그의 투병생활에 힘이 될 줄 안 나의 기대는 서운케 무너졌다. 지난 초여름 그는 고통 없는 세상으로 먼저 갔다. 내 글은 마지막 잎새만도 못하다. 죽음엔 순서가 없다는 것처럼 무서운 삶의 허방은 없다."

풍경이 상처가 되는 순간이다. 박씨가 속내를 털어놓은 노년의 지혜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아름다움은 함께 나눌 사람이 없을 때 독(毒)이 될 수 있다는 것. 풍경과 상처 모두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아치울의 계절 변화는 머리가 아니라 몸 속 더운 피로만 느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치울=우상균 기자

hothea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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