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核개발-체제보장' 빅딜 제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25일 담화는 여러 메시지를 던졌지만, 그 핵심은 새 핵무기 개발계획을 대미(對美)협상 카드로 삼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한·미 양국의 핵개발 폐기 요구를 사실상 거부하면서 미국이 위협하는 생존권 보장을 위해 핵개발에 나섰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핵문제의 해결 방도로 내세운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 포기 주장을 구체화한 것이다. 기존의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과 맥락이 다르지 않다. 새로운 제안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북한의 이런 입장에 미뤄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간 대치 국면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핵 카드화 의도 드러났다=북한은 "북한이 핵개발을 시인했다"는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를 인정했다.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를 가지게 되어 있다"고 해 핵개발이 진행 중임을 밝혔다. 그러면서 한·미 양국의 선(先)핵개발 계획 폐기 요구를 일축했다. "우리가 무장을 놓은(무장해제) 다음에 협상하자는 주장은 비정상적인 논리다. 우리가 발가벗고 무엇을 가지고 대한단 말인가"라고 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 측 주장에는 핵개발을 미국과의 협상재료로 쓰겠다는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며 "1994년 핵위기 때의 벼랑끝 전술 색채도 풍긴다"고 말했다. 새 핵개발 계획을 시인한 것이 당시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한 핵연료봉을 실험용 원자로에서 빼내 이를 지렛대로 삼아 대미 협상에 나선 것과 닮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불가침 확약이 해법"=북한은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을 핵문제 해결의 틀로 내놓았다.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통해 핵 불사용을 통한 불가침을 확약하면 미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먼저 체제보장을 하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기존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북한 매체들은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면 대량살상무기 개발·확산을 포기할 수 있다고 보도해 왔으며,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지난 21일 같은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핵문제의 대화 해결에 무게를 실은 것은 일단 고무적이다. 여기에는 추가 강경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뜻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 입장은 우리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한 문제는 남북이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핵문제 장기화할 듯=담화 내용으로 미뤄 북·미 양국이 핵문제 해결의 접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계획 폐기가 이뤄져야 협상이 가능하다는 입장인 데 반해 북한은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이 우선이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이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핵문제는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다만 북한 핵문제가 당장 위기로 치달을 가능성은 작다. 양측 모두 대화를 통한 해결원칙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 문제를 정리하면 북한 핵문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수도 있다. 미국은 26일 열릴 한·미·일 3국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문제 해결에 관한 중·단기 지침과 제네바 합의 준수 여부에 관한 입장을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영환 기자 hwasan@joongang. co. 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