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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공개 연천군 백제 적석총-'기원전후 백제 건국설'논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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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백제의 건국시기와 관련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되살아날 조짐이다.

지금까지 문헌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고대사의 정설은 3세기 후반 백제가 국가의 형태를 갖췄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일제시대 우리 사학계의 태두였던 이병도(李丙燾)선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3세기 후반 건국설'은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다른 해석이었다.

그러나 이는 1988년 몽촌토성 발굴 이후 잇따른 고고학적 발굴로 백제의 건국 시기는 삼국사기(부속박스 참조)에 나와있는 대로 기원 전·후로 봐야한다는 고고학계의 도전을 받아왔다. 두 진영간의 논의 결과에 따라 현행 역사관련 교과서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사안이다.

지난 15일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에서 공개된 백제 적석총으로 그런 문헌사학자-고고학자간의 '해묵은' 논쟁이 재연되는 양상이다.

발굴을 주도한 기전문화재연구원측은 "학곡리 백제 적석총에서 수습된 타날문 토기와 낙랑계 토기들은 2세기 무렵의 유물들이다. 따라서 적석총이 2세기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적석총이 2세기 이전에 축조됐다는 사실은, 백제가 기원을 전·후해 경기·강원 일대에 어엿한 국가 형태를 갖췄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뒷받침한다는 게 연구원의 주장이다.

현장에 지도위원으로 참석했던 고고학자들도 이같은 연구원측의 발표에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들이었다.

이같은 발굴 결과 발표에 대해 문헌 사학계는 공식적으로는 의사 표명을 삼가고 있지만 내심 불편한 입장으로 보인다.

고고학자이지만 문헌사학계의 '정설'을 편들어왔던 충남대 박순발(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의 입장은 꽤 강경해 보인다. 박교수는 "백제와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다만 기원 18년에 백제가 건국됐다든지 하는, 역사적 사실과 삼국사기 표기 연대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이어 "연구원측이 학곡리 적석총 연대 추정의 근거로 삼은 타날문 토기는 산화소성(酸化燒成:공기에 노출된 상태에서 토기를 굽는 방식)해 만들 경우 제작 연대가 2백년까지 차이난다"며 "학곡리 타날문 토기로 적석총 축조 시기를 2세기 이전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연구원측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며 2세기 한강 하류를 지배했던 세력은 예족"이라는 것이다.

반면 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자들은 "백제 적석총이 삼국사기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훌륭한 증거"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연구원의 김성태 학예연구실장은 "학곡리 적석총에서 나온 타날문 토기는 인근 파주 주월리 주거 유적에서 발견된 타날문 토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양식이다.

주월리 토기는 탄소 연대측정한 결과 2백50년∼3백50년에 제작됐기 때문에 그만큼 적석총의 축조 시기는 빨라진다"고 반박했다.

서울대 최몽룡(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중부 지역에서 백제 적석총이 발견된 것은 학곡리가 여섯번째"라며 "백제의 강역을 밝힌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조유전 전 문화재연구소장도 "풍납토성·몽촌토성 발굴에 이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백제 유물 발굴이 추가되면서 문헌사학계 정설이 도전받고 있다"며 "언젠가는 문헌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간의 뜨거운 논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속 발굴과 지속적인 논의를 통해 고대사의 정설이 뒤바뀔지 주목된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삼국사기에 백제는 …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8년 온조가 남하해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백제가 건국됐다'고 기록돼 있다. 온조왕 13년인 기원전 5년에는 '백제의 강역(疆域)은 동(東)으로는 주양(춘천), 서(西)로는 대해(서해), 북(北)으로는 폐하(예성강), 남(南)으로는 웅천(안성천 또는 금강)에 이르렀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문헌 사학계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인정하지 않아 왔다. 백제의 건국시기는 왕실이 고정된 고이왕(234∼286년)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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