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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지방자치11년성적표>3회-학생유치에승부거는지방대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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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방대에 가을은 너무나 잔인한 계절이다. 낙엽이 한꺼번에 지듯이 학생들이 재수학원으로, 편입학원으로 우수수 빠져나가지만 신입생을 유치하기는 해가 갈수록 어렵기 때문이다.

부산 D대의 한 강의실. 수강신청자는 40명이 넘는데 수업을 받는 학생은 20명선이다. 나머지 학생은 지금 수능시험을 준비 중이다.

"7명이 입학하자마자 휴학했어요. 2학기에도 4명이 휴학했고요. 10월 들어 몇몇이 갑자기 학원으로 갔어요. 재수해서 서울로 진학하기 위해서죠."

金모(19)군은 골치아픈 수능 대신 편입시험을 준비 중이다.

부산 현광편입학원 정미원 과장은 "편입 준비를 하는 대학생이 부산지역에만 1천5백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전국의 지방대가 수도권을 향한 학생들의 대이동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올해부터는 전국의 대학 신입생 모집정원(67만1천명)이 응시자(65만5천명 추산)보다 많아 지방대학 종사자들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수도권 대학은 진공청소기

영남의 K대, 호남의 S대는 올해 신입생을 정원의 50%도 못 채웠다. 모집 당시부터 정원에 미달한 학과도 많은 데다 합격하고 등록을 하지 않는 학생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충원율이 70%를 밑도는 대학이 40여개, 50% 이하인 대학이 5개라고 밝혔다. 이들 대학은 거의 모두 지방대다.

학생들의 지방대 외면 현상은 지방의 거점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국립대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대의 경우 올해 1차 합격자 4천1백46명 중 7백53명이 등록하지 않았다. 경북대도 마찬가지여서 4천1백1명 중 미등록 학생 수가 5백54명이었다.

전통의 명문 사학인 동아대에선 3천5백50명 정원에 절반이 넘는 1천9백3명이 등록을 포기했다. 동아대 관계자는 "복수지원 등을 통해 학생들이 맹목적으로 수도권으로 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9학년도 서울 소재 대학의 합격자 10만8백86명 중 지방 고교 출신자는 48.8%인 4만9천2백53명이었다.

또 2001학년도 1학기 수도권 대학 편입생 3천6백30명 중 40%인 1천4백40명이 지방대 출신으로 집계됐다. 학생들이 지방⇒수도권⇒서울의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능이 끝나는 11월부터 대학마다 학생 유치작전이 치열하다. 대학들은 전세버스를 동원해 고교 3학년생들을 단체로 초청, 홍보활동을 벌인다. 교수들은 유치단을 구성해 연고 지역·고교를 찾아가 교사들에게 머리를 숙인다. 입시지도 때 신경을 써달라는 얘기다.

전남 J대 李모 교수는 "학생 모집이 교수 업적평가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됐다. 고교는 물론 예비군 훈련장까지 가서 학교 홍보를 해야 한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부산 B대 朴모 교수도 "고교 방문단에 참가하라는 e-메일을 받고 '학생 호객꾼'이 된 것 같아 참담했지만 이것이 지방대의 현주소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지방대 부실 악순환

대전의 D대 전임강사 金모씨는 최근 '운동 중'이다. 모교인 서울 S대는 그만두고 일단 서울권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아무래도 서울에서 연구하는 것이 낫고, 아이들 교육 면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방대는 우수한 교수인력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학생 모집이 어려우니 재정이 악화되고, 자연히 전임교원보다 겸임·시간강사를 주로 채용하게 되는 데다 임용한 교수들도 수도권 대학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부산 동아대 정희준(체육학)교수는 "부산 시내 주요 대학의 경우 1년에 5,6명은 수도권으로 옮긴다"며 "우수한 교수인력은 그만큼 옮길 가능성이 커 임용 때 고민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부산대 김인(행정학)교수는 "행정학과의 경우 학부에 석·박사, 행정대학원까지 교수가 7명인데 서울대는 20명이다. 그러다 보니 행정대학원에서 지방 공무원들의 교육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전북 C대학 기획조정처장은 "신입생 충원율이 80%에 못 미치고 편입학 등으로 재학생 중퇴자가 속출, 등록금 수입이 크게 줄어 도서관 확충·연구실 확대·전산화 등 신규 투자는 고사하고 인건비 확보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충북 K대의 경우 등록금이 감소하면서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재단과 학생 간에 갈등이 빚어져 현재 학생들이 "등록금을 수업에만 쓰라"고 항의하며 수업을 거부하고 있다.

◇자구 몸부림 대안 찾기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오전 8시40분 서울역 1번 플랫폼에서는 '열차 강의'가 시작된다. 빔 프로젝터가 설치된 장항선 새마을호의 맨 끝 1호객차에서 '여성과 철학''세계 여행'이라는 2학점짜리 강좌가 열린다. 충남 아산에 있는 순천향대가 철도청과 교류협정을 맺고 이번 학기부터 열차 강의실을 개설했다.

이 대학 학생의 75%가 수도권에 살기 때문이다. 서울 반포에 사는 박정은(22·환경보건학과3)씨는 "통학시간을 이용해 강의도 듣고 학점도 딸 수 있게 한 아이디어가 좋다"고 말했다.

전북 남원의 서남대는 올해 충남 아산에 제2캠퍼스를 열었다. 충북 영동의 영동대 역시 2004년 아산에 제2캠퍼스를 마련할 예정이다. 이들 대학 관계자는 "조금이라도 서울에 가까워야 학생들이 한명이라도 더 지원할 것이 확실해 취한 조치"라고 말했다.

이같은 자구 몸부림은 거대한 진공청소기로 변한 수도권 대학에 학생들을 한명이라도 덜 빼앗기려는 비정상적이고 임시방편적 대안일 뿐 근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정부는 지방대학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5백억원의 국고보조금을 마련해 30여개 우수 대학에 집중 지원, 특성화를 통해 자생력을 키우겠다는 입장이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지적이다.

전북대 두재균 총장은 "지방 살리기의 밑거름은 인재양성이고, 이를 위해서는 지방 국립대를 거점화해 인재를 육성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방 국립대는 한정된 정부예산·등록금 동결 등 제약이 많아 사립대에 비해 더욱 발전이 어려운 만큼 정부의 지속적인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총장은 자구노력의 일환으로 "기업에 맞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커리큘럼을 개방하겠다"고 말했다. 대학 4학년이 되면 기업에 필요한 교육시스템을 도입하고 인턴 등 기업연수를 교과과정으로 인정하는 한편 학교 커리큘럼을 아예 기업에 맡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경북대 박찬석 교수는 경북대 총장 재임 시절부터 '지역 인재 할당제'를 부르짖고 있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의 '지역 할당제'와는 반대되는 입장이다. 현실적으로 무엇보다 취업이 대학 선택의 첫째 조건인 만큼 공무원의 임용 및 자격시험 등에서부터 인구비례로 지역 인력을 선발하자는 것이다.

그는 "우수한 인재가 빠져나가면 지방의 인적 생산성이 떨어져 사회·경제적 여건이 악화되고, 우수한 인력이 지방을 외면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며 "인재를 지방에 잡아두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지방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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