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핵파문]94년 핵위기 때와는 상황 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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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함에 따라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1994년의 핵위기가 8년 만에 재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북한이 영변의 원자로를 이용해 80년대부터 핵개발을 추진해 왔다는 징후가 90년대 초 포착됨에 따라 이를 중단시키려는 국제사회의 압력이 고조됐고, 북한은 핵확산 금지조약(NPT) 탈퇴라는 초강수로 맞섰다.

미국은 93년 5월부터 1년간 30여 차례나 북한과 접촉, 개발 중단을 종용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급기야는 당시 미 클린턴 행정부가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적극 검토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백악관은 전면전으로 확대될 경우에 대비해 미군 증파 계획까지 마련했다는 것이 훗날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94년 3월엔 박영수 남북회담 북한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까지 겹쳐 시민들의 사재기 현상까지 나타났다.

위기 해결의 돌파구는 그해 6월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金日成)주석의 회담에서 마련됐고, 10월에는 핵개발 동결을 대가로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북·미간 제네바 합의에 이르게 됐다.

그로부터 8년 뒤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에 맞춰 북한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해 온 사실을 시인함에 따라 또 다른 핵위기가 고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몇 가지 점에서 당시와 차이가 있다.

우선 북한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했다는 점이다. 94년 미국은 "북한이 한두 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거나 제조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북한이 갑작스레 핵개발 사실을 시인한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사태의 추이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이번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국제사회를 향한 북한의 태도와 입지가 94년 때와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당시엔 북한이 고립주의를 자처하며 벼랑끝 외교 전략을 구사함에 따라 위기가 증폭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북한은 대외개방 자세를 분명히 하면서 남북 관계는 물론 미국·일본을 포함한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예영준 기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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