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나는 철새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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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며칠 전 한 텔레비전 뉴스는 수천 마리의 철새들이 천수만에 날아드는 광경을 방영한 바 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철새의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의미의 철새의 계절도 함께 시작됐다. 대선을 앞두고 여지없이 철새 정치인들의 당적 옮기기와 이합집산이 시작된 것이다. 민주당의 전용학 의원과 자민련의 이완구 의원이 한나라당으로 말을 갈아탄 것이 그 신호탄이다. 특히 이들이 민주당의 얼굴인 대변인과 자민련의 원내총무 등 요직을 거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를 바라다보는 국민들은 짜증을 넘어 허탈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정치권의 이합집산에 불안하기만 하다.

물론 이들이 당적을 옮긴 데에는 복합적 요인들이 작동했다. 우선 철새 행각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우리의 그릇된 정치풍토와 심상치 않은 충청권의 민심, 그리고 양지만을 추구하는 이들 두 정치인들의 철새근성이 원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회창 대세론을 확산시켜 35%대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한 한나라당의 공세 전략도 이번 사태에 중요한 요인이 됐다. 또 충청권에 대한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장악력 약화와 자신이 총괄했던 국민경선제를 사기극으로 몰고 간 김영배 의원의 자해극 같은 민주당의 내분도 이들의 당적변경 결정을 용이하게 만들어 줬다.

이번 사태에 대해 민주당과 자민련은 펄펄 뛰며 국회일정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정권 초기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을 무더기로 빼어 왔을 뿐 아니라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의원 꿔주기까지 한 전과가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이번 파동에 대해 뭐라고 시비를 걸 자격이 없다. 그렇다고 민주당과 자민련의 전과가 이번 사태를 정당화해준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민주당과 자민련의 유사한 행태를 한나라당이 그동안 격렬하게 비판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같은 3金정치의 청산을 주장하는 한편 16대 총선의 민의를 왜곡하는 인위적 정계개편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해 왔다는 점에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이를 자발적으로 오는 사람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피해가려는 것은 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에 불과하다.

정몽준 의원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鄭의원은 그동안 창당과 관련해 과거행적에 문제가 없는 사람만을 선별 영입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한편 한국 정치에 팽배한 배신의 정치를 강하게 비판해 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 자극을 받은 듯 적극적인 현역의원 영입에 나서는 한편 "정치인의 이합집산을 배신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모든 정치인이 해당되므로 정당을 옮기는 것은 배신이 아니라고 본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전과자이면 그것은 전과가 아니라는 잘못된 논리로서 그 같은 논리로 鄭의원이 주장하는 한국 정치의 혁명적 개혁이 가능할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이제 문제는 정치의 계절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배신과 철새의 정치를 언제까지 두고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모두들 비판을 하는데도 철새 정치가 근절되지 않는 것은 철새 행각이 이후 정치 이력에 별 지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철새 정치인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다음 선거 때 심판하는 것이다.

또 철새 정치인을 영입하는 정당을 기억했다가 심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철새 정치인이 그치지 않는 것은 한국의 정당이 이념적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에 이념에 의해 모이기보다는 단순한 친소 관계와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모여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부영 한나라당 의원의 동지는 오랜 재야투쟁의 동지였던 김근태 의원이 아니고 안기부 출신의 정형근 의원이고 김근태 의원의 동지는 또 다른 안기부 맨인 엄삼탁씨인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한국의 정당들이 이념적 거리를 좀 더 벌려 이념적·정책적 차별성을 갖는 것이 철새 정치인을 근절하는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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