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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가 있는 아침 ] - '물에 잠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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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정일(1962~ ), 「물에 잠기다」 전문

문명은 사라질 것이다
쿵쾅거리는 전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리 없는 침략에 의해,
인간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의지에 의해
문명은 일소될 것이다.

언젠가 들었던 적이 있던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가 그랬듯이
지각변동에 의해,
우리는 익사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잠수 헤엄을 좋아하진 않겠지
전하께선 마른 풀밭에 누워 쉬고 싶으시겠지
예쁜 어린이와 한 번 더 가고 싶으시겠지
그러나 장엄하여 이 구경도 괜찮다
서서히 바지를 벗으며 대륙이
바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그때, 목소리 좋은 아나운서들은
실컷 지껄이게 되겠지.
세계의 모든 방송국들은 열나게
구조 신호를 발신하겠지
익명의 신에게,
또뚜따 뚜뚜띠 뚜뚜또 뚜뚜떼
그러나 신은 이 우주에
한 백억 개쯤의 지구를 지어 놓고 즐기시나니
이 재미를 놓칠 리가 없다

제일 먼저 뜰 앞의 채송화가 젖겠지
그 다음엔 개들의 집이 젖고
잔뜩 물을 먹은 순하고 유순한 개들이
지금껏 자신이 지켜 준 주인을 찾아
미친 듯 현관문을 긁어대리라
딸깍 딸깍 딸깍 꺽, 꺽, 꺽
점점 물은 불어나 담벼락의 낙서가 젖고
나는 은희를 사랑한다
몰래 쓴 낙서가 지워지고
그녀의 아랫도리도 통통하게
물에 터져 불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사자의 배고픈 울음 같이 해일이 덮치며
참나무로 만든 교탁과
법정의 육중한 출구를 적시고
서가에 꽂힌 자랑스런 책들을 부풀게 하고
예수장이가 주여 주여 벌리는 목구멍에
콸콸콸 짠물을 쳐넣고
끝으로,
반짝이는 교회첨탑을 집어
삼키겠지.

모든 것은 잠기리라
지각변동에 의해
세계는 물에 잠길 것이다.
그러고 나면 무엇이 더 세상에 남을까
약삭빠른 놈은 재빨리
비늘을 달고 지느러미를 달고
아가미를 만들어 달겠지. 제 몸을 잔뜩
웅크려 유선형이 되겠지 아아
도미 쏘가리 대구 명태 꼴뚜기
세상엔 비린내 나는 것들만 가득 살아
물고기의 말을 해대겠지

거기서도 법률은 남으리라
바다의 생물에게조차
교육과 종교는 있으리라
아아, 아아, 아, 아, 살료쥬, 살류쥬!
악착같이 물귀신같은 거짓된 왕들은 살아나리라
나야, 나, 냐, 냐라늬까



대홍수로 세계가 물에 잠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약삭빠른 이들은 <살료쥬, 살류쥬!> 하고 물고기의 발음으로 말하고 비린내를 내며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있는 한 법률과 교육과 종교와 그것으로 권력을 만든 <거짓된 왕들>이 있게 마련.
목에 힘을 주느라 뒤틀리는 발음을 보라. <나, 냐, 냐라늬까>.
권력은 세계가 물에 잠긴 후에도 여전히 뒤틀려 있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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