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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탄압 부끄럽지 않다” … 골수 군국주의자 미나미 총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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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36년 8월 5일 제7대 조선총독에 오른 미나미 지로(南次郞·1874~1955). 오른쪽 양복 차림의 인물은 조선 정무총감에 임명된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綠一郞)다. 천황에 직속하는 친임관(親任官)인 조선총독은 일본내각 총리대신과 동격의 지위로서 식민지의 행정권·군대통수권·입법권·사법권을 모두 장악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제왕적 존재였다.

“미나미 지로는 1931년 만주사변에는 육군대신이었으며, 36년부터 42년까지 조선총독으로 억압정치를 펼쳤다. 또한 45년 3월에는 대일본정치회(大日本政治會) 총재로 천거된 군벌의 유력한 멤버였다.” 45년 11월 미 점령군 사령부가 밝힌 전범 지목 이유에 잘 나타나듯, 그는 철권을 휘두르며 이 땅의 사람들을 군국주의의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조선총독이자 대륙 침략의 주범이었다.

총독 시절 그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기치 아래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創氏改名), 신사참배 등 황민화 정책을 펼쳐 우리 민족의 얼과 혼까지 앗아가려 했을 뿐 아니라, 지원병 제도와 징병제를 실시해 침략전쟁에 이 땅의 사람들을 그들의 하수인으로 내몰았다. “현재 우리나라(일본)는 동양평화 옹호의 대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국민총동원하에 시국에 대처하고 있는 때인데, 대일본국민인 자는 그 신앙하는 종교의 여하를 불문하고 일제히 천황 폐하를 존숭하여 받들고 선조의 신기(神祇)를 숭경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바로서, 신교(信敎)의 자유는 대일본국민 범위에서만 용인되는 것이므로 황국신민이라는 근본정신에 어긋나는 종교는 일본 국내에서는 절대 그 존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38년 10월 7일 조선감리회 총회석상에서 한 신사참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협력을 강요하는 내용의 연설에 잘 나타나듯, 그는 우리 민족을 일제에 순응하는 ‘충량(忠良)한 신민(臣民)’, 즉 노예로 만들기 위해 노골적인 위협과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46년 5월 그는 A급 전범 용의자로 극동국제군사법정에 섰다. “연합국에서 나를 범죄자로 보는 것은 세 가지 점일 것이다. 만주국을 탈취한 지도적 인물, 조선에 대한 탄압정치의 실행자, 대일본정치회의 총재로서 전쟁 수행 협력자. 이상 직접·간접으로 일본의 정치적 책임자로서 지도적 입장에 있는 군벌의 유력한 멤버로서 나를 인식할 것이라는 점은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과연 그렇다면 나는 이와 같은 사실과 소신에서 일본 국민으로서는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법정 출두 하루 전 그가 남긴 소회와 달리 48년 11월에 끝난 전범재판은 철저하게 아시아인의 시각이 배제된 ‘승자의 재판’이었기에 조선과 만주 침략에 대한 그의 죄를 묻지 않았다.

54년 1월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이듬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군국주의자인 채로 삶을 마감했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오늘도 일본의 일부 위정자에게 군국 일본 시절은 자랑스러운 제국의 역사로 다가서기에, 그들에게서 침략의 과거사에 대해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 위에서 고기를 잡으려는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