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가 나서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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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대북정책 기본이 흔들리고 있다. 대북 화해정책의 절정이었다고 할 6·15 남북 정상회담이 뒷돈거래로 이뤄진 것이라는 의혹이 구체적 정황으로 제기됐다. 안보와 햇볕정책은 별개라고 金대통령이 누누이 강조했지만 햇볕을 쬔 군 수뇌부가 흐물흐물해져 북의 도발징후 보고서까지 무시 또는 삭제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여기에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영광마저 로비 덕이라는 최규선 문건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런 의혹과 논란은 DJ 개인의 영광과 명예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가 걸린 남북문제고 국가안보에 관한 중대사라는 점에서 신중하고도 명쾌하게 정리돼야 할 사안들이다. 이를 위해선 누구보다도 金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서 밝혀야 한다고 본다.

그 이유는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만이 이 문제를 밝힐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은 4천억원이 현대 계열사 어디로 갔다면 내부자거래로 공정위나 금감위가 나서 조사 할 일이다. 그러나 정상회담용으로 쓰였다면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만이 알 일이다. 북한을 드나들어본 사람이면 대체로 알 것이다.어떤 선의의 방문이든 북쪽에선 나름대로의 성의 표시를 요구한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동포들 소식을 들으면서 동포애적 성의 표시를 요청할 때 거절하기 힘들 것이다. 좋게 말하면 동포애적 성의 표시고 악의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뒷돈거래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을 주선하는 데도 이런 거래가 있었을까. 개인적 상상임을 전제로 할 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분단 이래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면 여러 난관이 예상된다. 실무 추진자들이 막힌 곳을 뚫어가며 성사시켜 나가자면 동포애적 '성의'도 보여야 했으리라.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실무 추진자들은 회담성사를 위해 뭔가 지원을 약속했을 수 있다. 여론화 과정을 거쳤다면 '뒷돈'아닌 '앞돈'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를 거치지 않은 게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여론 동의까지 구한 다음 추진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이런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면 대통령 측근이 총대를 메고 나서 지금이라도 그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국민적 동의를 얻는 게 온당하다. 청와대측이 말해왔듯 이런 일이 결코 없었다면 왜 4천억원에 대한 계좌추적을 하지 않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궁에 빠져든다.

노벨상 로비설도 따지고 보면 과장됐을 수 있다. 노벨상 수상은 국민적 염원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기 위해서도 알게 모르게 상당한 로비를 해야 한다. 영어로든 프랑스어로든 번역을 제대로 해 외국에서 출판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지원까지 하고 있다. DJ의 정치 역정상 노벨 평화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이를 노벨위원회측에 알리는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영향력 있는 국제적 인물들을 한국에 초청해 감동의 이산가족 상봉현장을 직접 보고 느끼게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이런 정도 일에 대통령 측근들이 관여했다면 상식이고 탓할 바도 못되고 또 소상히 밝힌다면 국민들은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이런 이해를 구하지 않고 딱 잡아떼기만 한다면 뒷돈으로 정상회담 이끌어 노벨상을 탔다는 일방적 의혹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또다른 대목이 국군 통수권자로서 군기강을 바로잡는 일이다. DJ의 햇볕정책이 다수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은 것은 안보와 화해·협력이란 두 축 때문이다. 그러나 북의 6·29 서해 기습전에서 우리 군의 대비는 안보라는 한 축이 무너졌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적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비상한 대응을 했어야 할 군 정보부대가 상하로 갈등하고 좌우로 반목했다니 군의 핵심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한 것 아닌가. 이런데도 대통령이 아무런 질책도 없이 침묵하고 있다면 군의 사기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불안해할 수 있다.

대통령과 측근들은 대북정책과 관련된 이런 의혹들을 반드시 임기 내 털어내야 한다. 이런 대북관련 의혹들이 다음 정권에서 밝혀질 때, 그 어떤 정권도 대북 화해정책을 다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화해정책 곧 남북 유착의 뒷돈 거래로 낙인 찍혀 어떤 화해·협력도 국민적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대북정책의 근간이 폐기처분될 위기다. 또 차기정권에서 이런 의혹들이 밝혀질 경우 우리는 또 한분의 불행한 전임 대통령을 갖는 국민이 된다. 털 것은 지금 털고 불가피하게 투명치 못했던 점을 지금이라도 투명하게 밝혀야 대통령이 살고 대북 화해·협력 정책이 승계될 수 있으며 나라가 의혹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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