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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억원의 진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보(韓寶)에 4천억원 대출'.

1996년 12월 14일자 본지 1면 기사의 제목이다. 첫 문장이 핵심이었다. '산업은행과 조흥·제일·외환 등 4개 은행이 자금난을 겪고 있는 한보철강에 지난주까지 은행당 1천억원씩 4천억원을 지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기사는 사실만을 전달하고 있지만, 행간(行間)의 의미는 4개 은행이 나서서 한보의 부도를 막기 위해 구제금융을 줬다는 뜻이었다. 당시 재계나 증권가에 파다하게 나돌던 한보그룹 위기설의 실체를 확인한 특종기사였다.

은행이 기업에 대출을 해준 사실이 신문 1면에 실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개가 사람을 물면 기사가 안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면에 그런 기사가 실렸다면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음을 뜻한다. 한보는 이 보도 이후 한달여가 지난 97년 1월 23일 5조원의 부채를 안은 채 부도를 내고 말았다. 한보의 부도는 한국경제에 외환위기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소통령' 김현철씨의 구속과 김영삼 대통령의 몰락이라는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지난주 주요 신문 1면에 은행의 기업대출 기사가 다시 등장했다. 주요 일간지의 머릿기사는 2000년 6월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천억원을 대출해준 경위와 용도, 향방을 다루었다. 기업과 대출금의 용도는 다르지만 등장 은행이나 '4천억원'이라는 대출액, 권력의 개입 의혹이 제기된 대출 경위 등은 공교롭게도 6년 전과 흡사하다. 당사자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96년에도 해당 은행과 기업은 대출 사실은 인정했지만 '정상적인 대출'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열쇠는 결국 진실이다. 한보 대출의 경우 YS의 측근이며 실세였던 홍인길 의원이 96년 11월께 청와대 경제수석과 관련 은행장들에게 청탁을 했다는 사실이 검찰진술에서 드러났다. 97년 한보 청문회에서 '모르쇠'로 일관했던 정태수 한보 총회장은 정권이 바뀐 후 99년에 다시 열린 경제청문회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1백50억원을 주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정상 대출'을 주장했던 은행장들은 대부분 업무상 배임(背任)과 뇌물수수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현대상선 4천억원 대출의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은 시간의 함수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머지않아 드러날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앞으로 정치권력이나 은행가에는 '대출을 해주더라도 4천억원은 피하라'는 경구(警句)가 나돌지도 모르겠다.

손병수 Forbes Korea 팀장

sohnb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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