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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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아, 이렇게 가을이 덜컥 찾아올 줄도 모르고 창문 훤히 열어놓고 자다가 감기에 딱 걸렸다. 그래도 가을바람만큼 기분 좋은 것도 없다. 책 중에서도, 스토리 배경의 공기나 바람의 느낌, 그 습도나 온도, 그리고 내음을 현실처럼 체감하게 해주는 '통풍이 잘 된' 책들이 좋다. 상상력이 입체화되고, 나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토끼 눈 뜨고 앉아있는 것이다.

14세 때 읽었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혜린 지음, 민서출판사)는 독일 뮌헨의 쓸쓸한, 뼈마디에 저미는 듯한 바람을 안고 있다. 마음 속은 생각들로 터질 듯한데, 막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책 속의 팽팽한 공기는 사춘기 시절의 나를 질식시키듯 유혹했다. 엄밀하게 '작가'도 아닌 그녀가 쓴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유학일기일 뿐인데도, 그녀의 원초적인 힘은 세월의 흐름에도 변색할 일이 없다.

또 인정사정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하면 스티븐 킹의 작품들이다. 미국 메인주의 눈보라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하며, 그의 소설이 섬뜩한 것은 불길한 징조를 느끼게 하는 그 특유의 '안개 섞인 습한 공기' 탓이다. 읽고 있노라면 내 몸이 끈끈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꼭 찬물로 샤워하게 만드는 작가다. 명쾌한 그의 필력의 비결은 『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킹 지음, 김영사)를 통해 훔쳤다.

콧등을 간지럽히는 따뜻하고 흐뭇한 바람을 느끼기에는 『먼 북소리』(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중앙M&B)만한 것이 없다. 장편을 완성하는 동안 로마와 그리스의 섬에서 보낸 하루키의 3년간의 기록에서는 작열하는 태양의 눈부심, 지중해 바닷바람의 짠내, 심지어 올리브 오일로 지글지글 구워지는 정어리의 냄새가 진동한다.

드라이하면서도 멜랑콜리한 바람은 『속깊은 이성친구』(장 자크 상페 지음, 열린 책들) 안에서 솔솔 불어온다. 상페의 '흐르는' 일러스트와 여운 넘치는 짧은 이야기 속에 녹아든 파리의 풍경. 가로수가 휘이휘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샹송의 흥얼거림, 사람들의 심드렁한 표정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고, 그 겉과는 달리 속내는 아릿한 연인들의 마음이 읽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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