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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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대사는 미스터리 투성이다. 특히 우리 고대사의 가장 기본적인 미스터리는 문자로 기록된 사료(史料)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역사책으로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가장 오래됐다.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성암고서박물관 소장)이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이니까, 한민족이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고조선 말 이래 1천년의 세월이 역사기록의 공백인 셈이다.

이웃나라들과 비교하기에 부끄러울 정도다. 중국에선 지난 7월에도 기원전 3세기 죽간(竹簡·대나무에 기록한 문서) 2만여 점이 우물터에서 쏟아져 나왔다. 논란의 소지는 있지만, 어쨌든 일본도 서기 720년에 쓰여졌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내세우며 '일본이 2백년간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고 있다.

그 안타까운 공백 가운데 우뚝 솟은 보물이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다. 고구려왕의 기상처럼 만주 벌판에 우뚝 솟아 있는 비석은 서기 414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집 높이(6.39m)에 37t 무게인 자연석의 4면에 모두 1천7백75자의 한자가 아름다운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다. 『삼국사기』 최고본보다 최소한 8백년 이상 앞선 기록이다. 당대의 고구려인이 직접 짓고, 깎은 것이기에 그 자체가 역사다. 문서로 된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고대 금석문(金石文)은 중요하며, 광개토대왕비는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다.

문제는 광개토대왕비가 회칠로 일부 훼손됐다는 점이다. 일부에선 "19세기 말 전후한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 밀정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작으로 회칠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4년 중국인 학자들의 정밀조사 결과 19세기 말 중국인 탁본 기술자가 편의상 회칠을 한 것이라는 설명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래서 비석이 훼손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탁본은 중요하다. 훼손 이전인 1889년 만들어진 희귀 탁본이 최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한국금석문집성』 제1권으로 발간됐다. 한학자 고(故)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선생이 평생 수집한 금석문 가운데 가장 귀중한 탁본이다. 일반인으로선 판독하기 힘들 정도로 희미해진 비문(碑文)이지만 거친 흑백의 요철(凹凸) 가운데 고구려인의 말발굽 소리가 묻어나는 듯하다.

오병상 대중문화팀장

ob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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