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2> 사이버 공간의 평화를 위해-다양한 문화·인종 끝없이 대결·융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학교 사이트로 들어가니 1학년 학생으로부터 질문이 들어와 있다. "9·11 테러 1주년입니다. 빈 라덴은 못 잡고 애매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만 곤욕을 치렀는데요. 부시가 또 이라크를 공격하겠다는 것은 이해가 안됩니다."

옆에 놓인 신문을 보니 이스라엘 군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청사를 크레인으로 부수고 있는 모습이 눈을 찌른다. 빈 라덴은 왜? 부시는 왜? 그리고 샤론은 또 왜 저러는가? 답답한 마음에 검색 사이트에 접속해 'Bush'라고 입력해 보니 1백만개가 넘는 관련 사이트와 문서가 뜬다.

정치적 유머 사이트(http://politicalhumor.about.com)를 찾아가 본다. 각양각색의 기발한 만화들 속에서 부시와 빈 라덴이 함께 사람들을 웃기고 있다. 빈 라덴 화장지 뒤로 글래디에이터(검투사) 모습의 부시가 눈에 살기를 돋우고 있다. 조금은 답답함이 풀린다. 잠시 웃다가 생각을 정리하고 학생에게 보낼 답변을 위해 키보드를 치기 시작한다.

이 같은 필자의 일상이 결코 남다를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터이다. 온라인을 배회하는 군상들 중에는 '클릭'하므로 존재한다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게임 속에서 삶' 같은 삶, 아니 그런 삶보다 더한 삶을 찾으며 밤과 낮을 잊은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 사이버 공간에서 어떤 문명들의 충돌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사이버 공간은 우리들 마음 속에 있다=인터넷은 전 세계를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갖가지 멀티미디어 및 디지털 기술을 결합함으로써 실시간으로 모든 지역, 모든 방향의 다양한 상호작용이 가능한 하나의 독립된 세계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통신체제인 인터넷을 하나의 공간으로 느낀다. '거기에서' 물건을 사고, 이야기를 하고, 꿈을 꾸고, 방황하며 현실과는 판연히 다른 사회적 관계를 맺고 '빠져 나온다'. 사이버 공간은 이제 우리들의 마음 속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충돌=뉴 미디어의 물결은 라인과 라인 바깥을 갈라놓으며 흘러가고 있다. 강의 양쪽 제방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인터넷으로 맺어져 있고 동시에 그 때문에 갈라져 있다. 온라인의 열기와 질주는 이미 오프라인의 제방에 구멍을 뚫어 놓은 지 오래다. 온라인은 컴맹과 기계치를 마음껏 조롱하면서 강변한다. 너희들은 생각의 속도가 지배하는 희망의 시대에 살기 위해 변화해야만 한다고….

#만남과 부딪힘=사이버 공간에서는 만남과 부딪힘, 어우러짐과 갈라섬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사이버 공간은 시끄럽다. 안티 테러, 안티 기독교, 안티 이슬람, 안티 부시 사이트가 야유와 폭언, 조롱과 협박으로 가득 채워지고 친 팔레스타인 사이트 몇 개가 외롭게 사이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샤론에게 죽음을!".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숨져가는 아이들의 사진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런가 하면 촘스키 교수의 깐깐한 미국 비판이 낭랑하고 전쟁과 테러의 중단을 요구하는 비정부기구(NGO)들의 충정이 간절하다. 알 카에다의 메시지와 백악관의 홈페이지와 포르노가 단 한번의 클릭을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는 곳. 충돌과 융합, 시장의 열기와 인류의 희망이 밤낮 없이 이합집산하는 곳. 그곳이 사이버 공간이다.

#묶임과 풀림=사이버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묶여 있고 이어져 있다. 이 묶임과 이어짐은 한편으로는 은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속박이며 감시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상의 공간으로 들어가지만 그곳에서 수시로 갇힘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방문한 모든 사이트는 기록되고 메일 내용은 언제든지 검열될 수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일거수 일투족에는 모두 요금이 부과되고 사방은 광고로 도배된다. 열림과 풀림, 나눔과 기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반저작권, 정보와 소스의 공유, 통신의 자유와 프라이버시의 보장을 위해 싸우고 있다. 특히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피어투피어(P2P) 네트워크 모델은 정보제공자와 정보이용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버림으로써 사이버 공간의 개방화, 탈중심화, 민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무기가 됐다. 이 싸움의 결과가 사이버 공간이 민주공화국으로 갈 것인지 전자제국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틀짜기와 힘겨루기=2002년 4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2002 정보사회에 관한 유럽ㆍ중국 공동 포럼'개회식에서 중국 정보산업부 우지추안 장관은 2005년에는 중국의 정보산업 시장의 규모가 현재의 2배에 이를 것이며 그때까지 세계 최대의 유무선 전화 네트워크를 갖출 것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함으로써 유럽측 참석자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네트는 사통팔달 연결돼 있고 새로운 정보기술은 시시각각 소통의 질을 향상시켜가고 있다. 하지만 시장과 자본의 사이버 공간 틀짜기는 피나는 경쟁과 빈틈 없는 이해관계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편이 옳다. 그러나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민주적 공동체의 꿈을 지닌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을 충돌과 융합을 넘어 어우러짐과 상생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이버 공동체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주장한 하워드 라인골드는 인터넷의 특징인 실시간 쌍방향 상호작용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친밀하고 발전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이버 공간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박스기사 참조).

#인간 속의 기계, 기계 속의 인간=어느 통신회사의 홈디지털 시연관. 정보기술을 활용한 홈 네트워크, 온라인 쇼핑, 원격교육, 원격진료를 미리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침실을 둘러보니 원격 건강진단기가 수시로 심전도, 혈압 등을 체크해 데이터를 의사에게 보낼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정보기술은 단순한 주거공간이었던 집을 언제 어디서나 원격조정이 가능하고 자동으로 인간의 생활을 챙겨주는 일종의 거대한 로봇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이처럼 기술은 이미 인간의 주위에 기계를 에워싸고 인간에게 기계를 입히고 인간의 몸 속에 기계를 심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계에 인간을 심을 것이다. 기술은 만족을 모르고 신과는 달리 일곱째 날에도 쉬지 않는다.

미국의 로봇공학 전문가 한스 모라벡은 마음을 이식하는 수술을 통해 마음이 죽지 않은 사람은 영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디지털화해 저장된 뇌 속의 기억과 정보는 사이보그에 투입돼 이 세상을 다시 살아가거나 가상공간 속에서 영원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필자는 머리를 만지며 잠시 전율을 느낀다. 일찍이 하이데거가 주장한 대로 현대 세계의 기술적 열광은 지구의 정신적 몰락으로 이어질 것인가.

#상생의 공간=사이버 공간을 너와 내가, 문명과 문명이, 인간과 기계가, 현재와 미래가, 현실과 가상이 화해하고 상생하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수많은 사이트들을 돌아 나오면서 인터넷의 강 위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온기를 애써 느껴 본다. 부시와 빈 라덴의 만화를 보았을 그들의 웃음을 떠올린다. 전쟁과 테러에 반대하는 절절한 목소리와 동영상을 올려놓은 그들의 뜨거운 마음을 되새긴다. 전 지구를 새로운 문화공동체로 묶어갈 참다운 미래는 공감을 길어 올리는 인터넷의 강 위에 끝없이 떠오르는 60억 개의 작은 '관용과 동정'의 별들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임정근<경희사이버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