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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여성이변해야한국이산다]5.궤도 벗어난 '아파트 부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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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달 26일 밤 서울 신길동 A아파트에서 긴급 반상회가 열렸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아파트값이 급등한 아파트단지 부녀회를 가격 담합 혐의로 조사하겠다고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부녀회는 반상회를 통해 '집값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일정 가격 이하로는 아파트를 팔지 말 것''가장 낮은 매매가로 거래하는 모 부동산과 거래하지 말 것'을 덧붙였다.

이에 대해 세입자인 주부 김모(44)씨는 "부녀회가 언제부터 집 가진 사람들의 이익단체가 됐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반대 의견을 내는 등 부녀회의 그릇된 활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부녀회는 주부들의 힘이 전국적으로 조직화한 '한국 사회의 숨어 있는 파워 조직'이라고도 불린다.

아파트 매매에서부터 알뜰시장 유치, 쓰레기 분리 수거에 이르기까지 부녀회는 주민, 특히 주부들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지만 대다수 주부의 무관심 속에 자치적인 봉사 모임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권 개입 등 일부 자치 부녀회의 궤도 이탈과 이를 방치하는 주부들의 무책임은 지역사회의 삶의 질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부녀회는 긍정적으로 활성화되면 집안에 갇힌 여성 에너지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통로로서 큰 잠재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더욱 많은 주부가 부녀회에 참여해 공익에 기여하는 조직이 되도록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파워 조직' 부녀회=아파트의 경우 공식적인 주민 대표는 공동주택관리령에 의해 동별로 선출되는 입주자대표회의다. 하지만 아파트 실정을 잘 아는 주부들로 구성된 부녀회가 아파트 살림의 '실권'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알뜰시장 유치, 단지 내 광고·배달에 따른 협찬금 받기 등 기금을 모을 수 있는 활동도 모두 임의단체인 부녀회 소관이다. 이에 따라 부녀회장이나 임원들이 '딴 마음'을 먹을 경우 잡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서울 가락동의 B아파트는 단지 내에 부녀회장을 탄핵하는 벽보가 나붙는 소동을 치렀다. 아파트 입주 당시 부녀회장으로 선출된 모씨가 아파트 현관 자동도어 시스템의 비밀 번호를 알려주겠다는 조건으로 중국집 등 각종 배달 업체에 1백만원씩을 요구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지역 상권에서도 부녀회의 영향력은 강력하다. 부녀회를 통한 '입소문' 때문이다. 경기도 한 신도시의 18개동 부녀회 대표는 이 지역 한 백화점의 특별관리 대상이다. 이 백화점에서는 부녀회 임원을 '오피니언 리더'로 분류, 정기적인 모임을 열어 식사를 대접하고 부녀회 행사 때 장소 제공·사은품 협찬도 해준다. 백화점 관계자는 "부녀회의 웬만한 요구는 무시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선거 때는 부녀회장의 몸값이 상한가를 달리게 되는 시기다.

서울 상계동에서 2년간 아파트단지 부녀회장을 지냈던 정모(38)씨는 "선거 때면 의원이나 의원 보좌관들이 찾아와 잘 부탁한다며 밥을 사고 간다"며 "동(洞)대표 부녀회장쯤 되면 경찰서장이나 동장 부럽지 않은 '지역 유지' 대접을 받는다"고 말했다.

서울 가양동의 C아파트 부녀회에서는 지난 6월 지방선거 때 몇몇 후보자에게 단지 내 방송을 이용해 선거 유세를 할 수 있게 해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따로 노는 부녀회, 무관심한 주부들=수익 사업에 치중하고 투명성이 떨어지는 일부 자치 부녀회로 인해 부녀회장이 '짭짤한 자리'로 인식되다 보니 부녀회장 선거가 혼탁해지는 부작용이 적지 않게 생기고 있다.

서울 구로동 D아파트는 지난해 부녀회장 투표 당시 후보자 중 한명이 같은 라인에 사는 주부 10여명을 임의로 동원해 선거에서 이기면서 말썽이 생겼다. 새로 생긴 아파트라 투표권자에 대한 규정이 모호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서울 상도동 E아파트의 경우엔 지난해까지 입주한 지 1년이 넘도록 부녀회가 꾸려지지 못했다. 부녀회장을 하겠다는 두 후보자가 상대방은 자격이 없다며 선거를 하지 않고 대결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대다수 주부는 부녀회 활동에 무관심하다. 중앙일보가 8월 중 6대 도시 전업주부 2백34명을 면접조사한 결과 부녀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6.4%에 불과했다.

계 모임(46.2%)·동창회(39.3%) 등에 비해 참여도가 크게 떨어졌다.

서울 일원동의 주부 김모(43)씨는 "부녀회라고 하면 외부 상인들에게 자릿세 받아다가 노인정에 음식 대접하는 곳 정도로 알고 있다"며 "언젠가부터 이 지역 주민들은 부녀회에 대해 나몰라라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참여연대 시민권리국 아파트팀 유성희 간사는 "주부들의 관심 없이는 부녀회의 투명하고 창의적인 활동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면서 "부녀회는 주민 참여를 유도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한편 주부들은 부녀회의 주인이 돼 지역 사회와의 연결통로로 활용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밝은사회포럼 이진우 공동대표는 "여성들에게 문턱이 높은 정치·경제 세계를 단편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부녀회 조직"이라면서 "부녀회는 주부들이 지역 사회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국가적 인프라인 만큼 적극 참여하자"고 말했다.

'뛰자 한국여성'1부 도움말 주신 분(무순)

▶한국여성개발원 김태홍 노동통계연구부장, 한정자 사회문화부장, 장혜경·박영란·이수연 연구위원▶삼성경제연구소 강우란·심상민 수석연구원▶연세대 사회학과 김용학·조한혜정 교수, 사회발전연구소 조혜선 박사▶이대 경영학과 강혜련 교수▶명지대 금융지식연구소 권태희 연구교수▶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이민규 교수▶한국외국어대 이탈리아어과 데 니콜라 교수▶인류학자 윤택림씨▶여성부 정책총괄과 손애리 사무관, 정책개발평가담당관실 정희진 사무관▶통계청 사회통계과 이내성 사무관▶노동부 김송자 차관, 강신철 여성고용과장, 평등정책과 김난주 연구원▶이숙영 LG CNS 상무▶제일기획 AP팀 유정근 수석▶한국갤럽 송혜란 연구원▶하나마케팅서비스 류정옥 실장▶밝은사회포럼 이진우 공동대표▶이혜경 여성문화예술기획 대표▶아파트주거생활연구소 심현천 소장▶서울국제여성회 비다 센쿠스 자선바자 총책임자▶서울외국인학교 정나영 개발담당▶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정명애 부모교육 강사▶봄빛 산부인과 김성수 원장▶압구정클리닉 이민구 원장▶차병원 소아과 염혜영 전문의▶신촌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중앙일보 주부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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