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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에 반해 퇴계가 아홉 달 머문 곳, 계곡 물 따라 신선의 마음이 흐르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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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호 04면

문경 선유동 계곡

‘선유동(仙遊洞)’
양쪽 선유동은 가까운 거리인데
지금은 그 사이에 구름이 한가롭고
어느 곳이 뛰어난지 평하기도 어렵도록
하늘의 장수가 있어 수석 고루 나눴네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조선환여승람』>

퇴계 이황이 감탄한 괴산 선유동 계곡, 고운 최치원이 사랑한 문경 선유동 계곡

속리산국립공원 내 대야산(930.7m) 자락에는 빼어난 경관으로 유명한 계곡이 두 곳이나 있다. 충북 괴산군에 속한 선유동 계곡과 경북 문경시에 속한 선유동 계곡이 그것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괴산 선유동 계곡을 외선유동, 문경 선유동 계곡을 내선유동으로 구분해 표기하고 있다. 두 곳의 경치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뛰어나다. 오죽하면 두 계곡 모두 ‘선유동’이라고 불렀을까. 조선시대 유학자 퇴계 이황은 7송정(현재 송면리 송정마을)에 있는 함평 이씨 댁을 찾아갔다가 괴산 선유동 계곡의 절묘한 경치에 반해 아홉 달 동안 머물며 9곡의 이름을 지었다. 통일 신라 말기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도 문경 선유동 계곡에 머물며 아홉 절경을 찾아 ‘선유구곡’을 썼다고 한다. 계곡 곳곳에서 퇴계와 고운이 새겼다는 문구와 글자를 찾아보는 것은 선유동 계곡에서 맛볼 수 있는 색다른 재미다.

충북 괴산 선유동 계곡
화양동 도립공원 내에 있는 괴산 선유동 계곡은 괴산군 송면에서 동북쪽으로 1~2km에 걸쳐 있다. 계곡 입구에 들어서면 상류로 가는 길목에 선유동문(仙遊洞門)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볼 수 있다. 선유 제1곡이다. 이곳은 다른 계곡보다 깊고 잔잔해서 수영을 하거나 물놀이를 하기에 좋다. 선유동문에서 뒤를 돌아보면 제2곡 경천벽(擎天壁)이 보인다. 바위층이 첩첩을 이루고 그 사이에 나무와 풀이 자라 기묘한 모습이다. 신선이 들어가는데 구름이 따라 내려오자 더 못 내려오게 막았다는 바위다.

푸른 학이 둥지를 틀었다는 제3곡 학소암(鶴巢岩), 신선들이 금단을 만들어 먹고 장수했다는 제4곡 연단로(鍊丹爐)를 지나면 선유동 계곡에서 가장 넓고 놀기 좋은 제5곡 와룡폭(臥龍爆)이 나온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다. 용이 엎드려 있던 곳이라는 의미인데 용이 물을 내뿜는 것처럼 물소리가 벼락 치는 듯하다. 그렇지만 와룡폭도 수다와 즐거움이 가득한 웃음소리를 이겨내지는 못한다. 놀러 온 여학생들은 바위 틈 사이로 세차게 흘러가는 물을 미끄럼틀 삼아 기차놀이를 한다. 나무가 드리워진 그늘에서는 가족들이 돗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한다.

제6곡 난가대(爛柯擡)와 제7곡 기국암(碁局岩)은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 집에 돌아가 보니 5세손이 살고 있었다는 나무꾼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 이곳 바위는 깎아놓은 듯 평평해서 신선이 경치를 내려다보며 바둑을 두는 모습이 쉽게 연상됐다.

제8곡 구암(龜岩)은 말 그대로 거북이 바위다. 계곡 옆으로 나있는 길을 걷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거북이가 머리를 들고 숨을 쉬는 모습이다.
마지막 제9곡 은선암(隱仙岩)은 신선이 머물다가 사라진 곳이라고 한다. 앞에는 얕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고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양쪽으로 서 있는데 신선이 퉁소를 불며 이곳에서 달을 희롱했다고 전해진다. 소나무와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흥취는 가히 신선이 노닐만했다.

<>경북 문경 선유동 계곡
괴산 선유동 계곡에서 약 10km 떨어진 문경시 가은읍의 선유동 계곡은 괴산 선유동 계곡만큼 유명하진 않다. 계곡이 넓지 않고 물이 많은 편도 아니다. 다만 괴산 선유동 계곡보다 길이가 더 길고 계곡미가 빼어나 문경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사람들의 방문이 적어 다른 계곡에 비해 산수가 깨끗하고 조용하다. 여름이면 이곳을 찾는다는 충북 출신 임상덕(78)씨는 “칼로 두부를 자른 것처럼 바위가 반듯해서 신기하다”며 감탄했다. 선유구곡 제1곡은 아름다운 안개가 드리우는 누대라는 옥하대(玉霞臺). 물이 흘러오는 방향으로 올라가면 야트막한 산이 보이는데, 이것이 선유구곡의 한 굽이를 만드는 제2곡 영사석(靈<69CE>石)이다. 시냇물 수준이라 배를 띄울 순 없지만 상상 속에서 바위는 유람선이 된다.

제3곡 활청담(活淸潭)에서 정기를 받아, 제4곡 세심대(洗心臺)에서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내면 제5곡 관란담(觀瀾潭)이 나온다. 몸과 마음을 씻어 푸르게 한다는 제6곡 탁청대(濯淸臺)는 제5곡에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발견할 수 있어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듯했다. 제7곡부터 제9곡까지는 한곳에 모여 있고 차량으로도 접근이 쉽다. 문경 선유동 계곡을 찾은 사람 대부분은 민박집과 식당이 있는 이곳에서 여유를 즐긴다. 도암 이재 선생을 기리는 학천정(鶴泉亭)이 있는데, 현재 이 일대에서 MBC 드라마 ‘김수로’를 찍고 있다.

7곡 영귀암(詠歸巖)과 제8곡 난생뢰(鸞笙瀨)는 신선의 세계를 나타낸다. 난생은 신선의 세계에서 연주되는 악기 ‘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제9곡 옥석대(玉潟臺)는 학천정 근처 평평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옥석은 ‘득도자가 남긴 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선인들이 이곳에서 도를 깨쳤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인들이나 지금의 우리나 풍류를 즐기는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문득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연결된 듯하다. 득도한 신선의 마음은 계곡물을 따라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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