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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상처만 주는 아버지, 아들 만날 자격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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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싫습니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달 초 서울가정법원의 한 법정. 가사23단독 최정인 판사가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하는데….” 재판부가 만날 생각이 없는지를 다시 물었다. 그러나 이모(19)군은 역시 냉담한 표정으로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답했다.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 윤모(46)씨도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 줬으면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날 이군이 법정에 출석한 것은 13년 전 부모의 이혼과 함께 연락이 두절됐던 아버지(49)가 올해 봄 “아들을 만나고 싶다”며 법원에 면접교섭 허가를 청구하면서다. 어머니 밑에서 자란 이군은 초·중·고교 시절 을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보내야 했다. 아버지는 양육비도 보내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생이 된 이군이 법원에 성·본 변경을 청구하자 이를 알게 된 아버지가 연락을 해 왔다. “만나서 이유를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군은 “지금 와서 왜 나를 만나려 하느냐”고 거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아들이 다니던 고등학교를 찾아왔다. 아버지는 교직원과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혼을 했는데 아들이 만나 주지 않는다”며 가정사를 늘어놓았다. 이군의 어머니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아들이 대학에 입학한 올해 초까지 이어졌다. 충격을 받은 이군은 휴학까지 고려하는 등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최 판사는 고심 끝에 이군 아버지의 청구를 기각했다. “아들에게 난처함과 수치심을 안겨 준 아버지와의 만남이 오히려 아들에게 상처가 될 것”이란 이유에서다. 가정법원 측은 “학대나 폭력이 우려되지 않는 한 면접교섭권이 제한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며 “이번 면접 청구 기각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배우자와의 결별 후 부모, 특히 아버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이혼 가정의 양육 상태 조사 등을 담당하는 서울가정법원 김희영 조사관은 “이혼할 때 힘들어도 자녀와의 소통을 장기간 단절해서는 안 되는데 감정 조절에 서툰 아버지들은 이 점을 간과하곤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 쪽에서 양육권을 갖게 된 경우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양육비를 지원하고 자녀와 대화하는 자리를 자주 마련해야 한다는 게 김 조사관의 설명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급격한 환경 변화를 겪은 아이들은 한쪽 부모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생각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전 배우자를 상대하는 것이 힘들더라도 자녀 문제는 함께 상의하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이혼 여성인 김모(38)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지난 1년간 전남편 몰래 만나 왔다. 김 조사관은 “상담 결과 아이들이 극도의 긴장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며 “아버지가 양육권을 가진 경우라면 자녀들이 어머니와 공개적인 만남을 갖도록 해 안정감을 되찾아 주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홍혜진 기자

◆면접교섭권 = 양육권자가 결정된 뒤 자식을 키우지 않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녀를 주기적으로 만나거나 전화·편지 등을 할 수 있는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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