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이성적인 굴복, 5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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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4강전
[제4보 (45~60)]
黑 . 저우허양 9단 白.왕시 5단

포도송이 형태로 한곳에 뭉쳐있는 모양을 바둑에선 최악으로 친다. 둥글게 뭉친 것이 잡히면 덩치만 클 뿐 쓸모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도송이'란 단어는 비능률의 극치를 표현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지금 우하 쪽에 흑의 포도송이 하나가 부끄럽게 매달려 있다. 흑의 저우허양(周鶴洋)9단은 이곳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얼굴이 붉어진다. 반대로 백의 왕시(王檄)5단은 이곳을 볼 때마다 저절로 미소가 흐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45, 47로 덮어가는 저우허양의 손끝이 분노로 떨리고 있다. 그는 A로 밀고 나오는 강수를 노리고 있다. 왕시는 48로 지켜 흑의 예봉을 피한다. 49의 돌파가 아프지만 이미 한 재산 벌어둔만큼 이 정도로도 충분히 채산을 맞출 수 있다고 본다. 게다가 왕시의 눈에 때마침 기막힌 한수가 보였다.

중앙 쪽으로 비스듬히 둔 52. 이 한 수가 마치 저 유명한 묘수인 '이적(耳赤)의 수'를 연상케 한다. 보면 볼수록 좋은 수여서 명인의 귀가 점점 귀가 빨개졌다는 슈샤쿠(秀策)의 그 한 수.

기세라면 '참고도' 흑1로 나가야 한다(이세돌9단이라면 천지개벽이 벌어져 대마가 몰살당한다 해도 이곳만은 나가고 봤을 것이다).

저우허양은 그러나 백2의 젖힘이 두려워 고통을 참으며 물러서고 있었다. 백2에 3으로 끊을 작정이었는데 지금은 백?이 축머리이고 B와 C가 맞보기. 그래서 53, 55로 물러선 것인데 이 바람에 56으로 깨끗이 봉쇄당하고 말았다. 저우허양은 역시 이성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점이 그의 정상정복을 막는 최대의 약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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