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아니면 鄭인데… 둘 합쳤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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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충장로는 여전히 인파로 붐볐다.명절 때면 늘 그렇듯 광주 사람들은 시내 중심가로 몰렸다. 그러나 대선을 3개월 앞둔 지금 이곳에서 정치 열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이 출마했던 1997년 목포에서, 순천에서, 그리고 금남로에서 휘몰아치던 그런 기운은 담겨 있지 않았다. "계 모임도 가보고 집안 어르신들하고 모여도 벨 말 없습디다. 옛날하고는 많이 다르요." 치과의사라는 尹모(39)씨는 20일 밤 대선에 대한 관심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옆에 있던 부인은 "경상도는 다르겄죠. 한나라당이 될 거라고들 생각할테니…"라고 거들었다. 호남의 '정치 1번지'라는 이곳의 이같은 반응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깔려 있다.

"김대중씨라 하믄 여그 사람들은 질려부렀어요. 30년 넘게 지지해 줬는디 그래야 쓰겄소?" 북구 우산동 말바우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하는 김종식(51)씨는 한표를 행사할 마음이 딱히 들지 않는다고 했다. 아들 문제 등 실정(失政)을 거듭한 데 대한 실망이다.

전주 지역의 공무원 盧모(46)씨도 "민주당이 저러고 있으니 요즘에는 신문 볼 기분도 안난다"고 말했다.

민주당 노무현(盧武鉉)후보의 지지율 하락이 여기에 더해졌다. "경선할 때만 해도 노무현씨가 참신해 보였는디 그동안 하는 걸 보니 딴 사람들이랑 벨로 다른 것 같지 않네요. 근다고 한나라당을 지지하겄소. 이회창씨는 뭔 일만 있으믄 경상도로 달려갑디다. 판사 출신인디 아들 군대 안 보낸 의혹도 그렇고."(44세 자영업자)

겉으로 드러난 이같은 모습이 전부는 아니었다. 전남대 앞에서 만난 세명의 회사원 일행에게 지지 후보를 물었다. 두명은 "관심 없다"고 했다. 그러나 김성수(35)씨는 정몽준(鄭夢準)을 꼽았다. 원래는 盧후보를 염두에 뒀었다고도 한다. "기존 정치인들하고는 다른 것 같고 경제인 출신이니 그쪽은 그래도 잘하지 않겠느냐"는 이유였다.

광산구 운남동에 사는 주부 윤숙자(62)씨는 "노인정에 가믄 다들 투표 안 할라고 했는디 정몽준이 나오믄 한 표 찍어주러 가야 겄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교직에서 은퇴한 김덕민(64)씨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정몽준 얘기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모임의 화제가 노무현에서 점차 정몽준으로 옮겨가는 것은 전북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익산 지역의 회사원 최성준(33)씨는 "젊은 사람들 가운데 정몽준을 밀겠다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鄭의원에 대한 확신은 아직 약해 보였다. "그건 이회창씨나 노무현씨에게 경고하기 위한 거죠." 김마성(26·전남대 4년)씨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회창씨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큰 것 같다고 했다. 함께 있던 일행 중 한명은 "정몽준씨는 재벌 2세라서 서민들과는 거리가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鄭의원에 대한 이같은 엇갈린 반응은 이 지역 여론조사에서 아직은 盧후보가 지지율이 앞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DJ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이명학(55)씨는 그래도 盧후보를 밀 것이라고 했다.

"정몽준씨는 사람이 무른 거 같애라. 검증이 시작되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녀요. 글고 민주당이 경선해 가지고 1위 했는디 죽으나 사나 그 후보로 가야지라. "

광주의 한 민주당 지구당 사무국장은 "광주 시민들은 아직 盧후보가 개혁적이고 지역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면서 "鄭의원의 지지는 민주당과 연계가 될 때 현실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익산에서 이동통신 대리점을 운영하는 洪모(33)씨는 "인기가 없다고 이제 와서 안 밀면 지역주의를 극복한다며 영남 사람인 노무현을 뽑아놓은 걸 어떻게 설명하느냐"고 물었다. 교사 이용성(36)씨도 "명분마저 놓치면 앞으로 호남이 설 자리가 있겠느냐"고 했다.

헷갈려 보이는 호남 정서를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지병문 교수에게 정리해 달라고 했다. "노무현 후보로 이회창 후보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정몽준 의원의 호감도를 높이고 있으나 아직은 관망하는 이들이 많다"며 "두 후보 중 어느 한쪽으로 힘이 실릴 경우 급속도로 쏠림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게 지교수의 풀이였다.

6년째 광주에서 개인택시를 하고 있다는 김재경(40)씨도 같은 말을 했다. "여그는 어쨌든지 반창(反昌·이회창 반대) 아니요. 아직 말들은 안허지만 盧나 鄭이나 둘 중 하나 아니겄소. 둘이 합친다믄 더없이 좋지라. "

광주=김성탁 기자, 전주·익산=나현철 기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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