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6>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 : 30.패티 페이지 등 내한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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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960년대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세 건의 해외 가수 내한 공연이 열렸다. 패티 페이지와 냇 킹 콜, 그리고 일본 가수 프랑크 나가이다. 패티 페이지와 냇 킹 콜에 관해서는 데뷔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간간이 언급한 적이 있다.

패티 페이지 공연은 62년 대한극장에서 열렸다. 공연 무대가 변변하지 못해 영화관을 공연장으로 급조해 거기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패티 페이지는 이른바 '스탠더드 팝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6·25가 할퀴고 지나간 50년대 초중반 그녀는 우아하고 감성적인 목소리로 우리를 위로했다. '아이 웬트 투 유어 웨딩'이 그때 즐겨 듣던 노래다. '체인징 파트너' 등 그야말로 주옥같은 그녀의 노래들이 잇따라 들어왔다.

50년대 말 패티 김이 그녀의 이름을 따 예명을 만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패티 페이지는 우리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녀가 한국의 대중과 처음 만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때 나는 포 클로버 멤버들과 함께 그녀의 무대에 서는 영광을 안았다. 우리는 초반에 두곡씩 모두 여덟곡을, 이어 우리의 유일한 팀송 하나를 더 불렀다. '따로 또 같이'를 모토로 한 우리는 함께 부른 노래가 하나도 없었다. 이때 처음 4중창을 했다. 최창권씨가 작곡한 곡이었는데,이후 부르지 않아 노래에 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우리들의 노래 다음에 패티의 노래가 이어졌다.

패티를 만난 느낌은 너무나 평범했다. 우리 넷의 공통된 의견은 "포근한 우리나라 아줌마 같다"는 것이었다. 당시 패티는 30대 후반이었는데, 미국 백인 사회를 장악한 금발 미녀의 오만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3년 뒤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냇 킹 콜 내한 공연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화제였다. 반도호텔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나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로라 성·곽순옥·남석훈·유주용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다음날 냇 킹 콜은 지금의 소공동 대한항공 빌딩 지하에 있던 라이브 카페인 '블루 룸'에 들렀다. 박형준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누가 즉석에서 한 곡을 부탁했다.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약속된 장소가 아니면 노래를 하지 않습니다." 역시 그는 우리보다 훨씬 고수였다.

당시 광주에서 공연 중이던 나에게 냇 킹 콜의 내한 소식은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의 냇 킹 콜'이라는 과분한 찬사를 경험한 나에게 그는 여전히 우상이었다. 그의 음악을 직접 듣고 싶어 당장 광주 공연을 접고 서울로 올라왔다. 공연에 흠뻑 빠져 한 곡 한 곡 가슴에 새겨두던 기억이 정말 새롭다. '투 영''언포게터블' 등이 불릴 때 소름이 돋는 감동을 느꼈다.

냇 킹 콜은 3박4일의 내한 기간에 단 한 차례 공연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는 지병인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는 며칠을 뜬눈으로 새다시피 했다. 공연 당시의 모습이 아른아른 눈에 밟혔다. 다행히 달콤하고 매혹적인 그의 목소리는 딸인 나탈리 콜에게 그대로 전수돼 그때의 아쉬움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당시 관객층은 다양한 편이었지만,아무래도 대학생들이 주류였다. AFKN(주한 미군방송)을 듣고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관람료가 상당히 비쌌는데도 흥행에는 꽤 성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랑크 나가이는 60년대 말 일본 대중 가수로는 첫 내한이었다.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는데,당시 일본 가요에 대한 일반인들의 좋지 않은 감정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본인으로 세계적인 매혹의 저음이면서 엔카에도 능했던 그였지만 대부분 팝송으로 공연을 채워야 했다. 마지막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의 대표곡인 '유라쿠조데 아이마쇼(유락정에서 만납시다)'를 부르는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남일해가 '한국의 나가이'로 통했다.

한·일 간에는 아직도 민족적인 앙금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라는 이슈가 민감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30여년 전 나가이 내한 공연 때의 해프닝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실감한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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