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행복한 책읽기] '서양미술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장 도미니크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대표적 낭만주의 작품인 이 멋진 누드화는 동방의 장식과 함께, 앵그르가 위대한 채색화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1814년작, 루브르 박물관 소장.

서양미술사(전 7권)
자닉 뒤랑 외 지음, 조성애 외 옮김,
각 권 220쪽 내외, 각 1만9000원

서양미술사에 관한 대표 저술은 단연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국내에선 그렇다. 1970년대 후반에 소개된 이후 미술사 분야의 '교과서' 역할을 해왔다.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통사(通史)란 장점 덕에 오랜 세월 미술학도의 애장도서로 손꼽혔다.

이 시리즈는 여기에 도전장을 낸 격이다. 백과사전으로 유명한 라루스 출판사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인문학의 보고이다. 또 영국의 파이돈, 독일의 타쉔과 더불어 미술출판계의 겁없는 삼총사로 꼽힌다. 막대한 투자로 알찬 기획서를 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라루스의 서양미술사 시리즈는 중세부터 현대까지 일곱 토막을 나누어 미술사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노출 수위'가 장난이 아니다. 역사의 후미진 뒷골목과 종교의 어둑한 미로를 죄다 보여준다.

글쓴이들도 그쪽 동네에서 한 가닥씩 하는 국보급 인문학자들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예술작품부 책임자 자닉 뒤랑, 미술비평가 제라르 르그랑, 현대미술 사학자 에디나 베르나르 등 쟁쟁하다. 프랑스의 지적 역량을 모두 모은 느낌이다. 이들은 미술의 역사를 동반하는 정치 사회 종교의 주요 흐름을 몇 줄 안 되는 분량에 딱 부러지게 짚어낸다. 단순히 화가의 연대기나 작품 해설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미술의 역사를 건축, 조각, 회화, 공예 할 것 없이 무쇠 가마솥에 쓸어 담고 군불 착실하게 지펴서 노골노골 익혀냈다. 미술사를 넘어 서양예술사 백과사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 시리즈의 가장 도드라지는 점은 책에 실린 글과 그림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반듯하다는 것이다. 이건 꼭 눈여겨볼 대목이다. 다른 학문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미술 출판 시장에도 양지와 음지가 있다. 가령 건축과 회화는 잘 팔리지만 조각과 공예는 뒷전이라던가, 인상주의는 냈다 하면 무조건 대박인데 표현주의는 보나마나 쪽박이라는 식의 월척 포인트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동네에 몸담고 있는 선수들은 다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똑같은 시장을 놓고 제 몫을 챙겨야 하는 유럽에서는 미술 출판계의 물밑 각축이 말도 아니게 치열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똑같은 서양미술사라도 독일에서 나온 책은 독일의 미술관.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으로, 영국산 서양미술사는 런던의 미술관.박물관과 인근 윈저 성 같은 곳에서 소장한 작품들로 도배하는 것이 상식이다. 독자들이 우선 책을 읽고 작품에 눈이 익어야 원작을 보러들 올 테고, 덩달아 자기네 나라 관광수입도 늘어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라루스 시리즈는 순진하달까 우직하달까, 순전히 죽 쒀서 남 좋은 일 하는 책을 선보이고 있다. 눈에 익은 대표작 위주 컬렉션이 아니라 작품성 위주로 권마다 120작품씩 다양하게 수록했다. 프랑스 인들의 건전한 균형 감각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가난한 건 봐줄 수 있어도 아름답지 않은 건 못 참는다"는 프랑스의 자존심이 이런 것이 아닐까?

사실 따지고 보면 서양미술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백 오십년을 못 넘기고 역사의 뒤안길 신세가 되었다. 위대한 발견의 시대에 세계의 해상권을 주름잡았던 네덜란드의 빛나는 유산도 애저녁에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영국과 독일 그리고 스페인의 미술 전통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세부터 현대까지 미술의 거친 텃밭을 힘든 내색도 없이 일구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렘브란트나 뒤러 같은 든든한 밑천도 없이 이처럼 1000년 넘게 미술 동네의 안주인 노릇을 하는 것은 만만한 저력 없이 될 일이 아니다.

라루스 서양미술사 시리즈가 새해 첫머리에 우리말로 옮겨진 것은 인문학이 챙긴 두둑한 세뱃돈이다. 충실한 내용이나 만만찮은 분량이면서도 지식과 재미를 함께 얻을 수 있어 지금까지 변두리 인문학으로 괄시받던 미술사학이 마침내 거두어낸 알뜰한 수확이다. 이 책이 꽂혀 있지 않은 인문학은 마치 하프 없는 오르페우스나 술잔 없는 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다. 아니, 날개 떨어진 이카로스라 하는 게 더 맞겠다.

노성두 <서양미술사학자>

*** 책갈피

"오늘날 미술은 도처에 존재한다. 미술은 더 이상 구별이나 경계를 알지 못한다. 미술이 전통적으로 펼쳐 보인 건축.회화.조각.판화의 영역에는 이제 사진.영화.디자인.새로운 매체의 탐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설치'와 '배치'가 추가되었다. … 20세기의 미술은 가장 '기묘한'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현대적'이 되는 것에 만족했다. 건축가 노먼 포스터는 홍콩 은행을 통해 투명성과 빈 공간을 보여주었고, 댄 플레이빈은 네온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백남준은 텔레비전 모니터를 재해석했다."

라루스 서양미술사 Ⅶ '현대미술' 서문에서 인용

*** 또 다른 책들은 …

'서양미술사'(E H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예경)

'당신의 미술관'(수잔나 파르취 지음, 홍진경 옮김, 현암사)

'서양미술사1.2'(에밀 말 지음, 정진국 옮김, 눈빛)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 산책'(웬디 베케트 지음, 김현우 옮김, 이주헌 감수, 예담)

'서양미술사'( H W 젠슨 지음, 최기득 옮김, 미진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