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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문화자존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다음달 18일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 '본 아이덴티티'(원제 The Bourne Identity)의 아시아 지역 시사회가 최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렸다. 현지 영화사가 배포한 자료에 표기된 제목은 '신귀인증(神鬼認證)'. 귀신이 인정하는 실력이라는 뜻이다. 맷 데이먼이 주연한 이 영화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CIA 요원 제이슨 본이 자신의 정체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스파이 실력이 출중한 제이슨 본을 잘 설명하는 제목이다.

타이베이 시내 한 극장에 걸린 '출궤(出軌)'란 입간판이 눈을 끌었다. 무슨 뜻일까. '궤도 탈출쯤 될까'하고 생각하던 중 리처드 기어와 다이언 레인의 얼굴이 보였다. 현재 국내에서도 상영 중인 '언페이스풀(Unfaithful)'이었던 것이다. 중산층 주부의 갑작스러운 일탈을 그린 영화 내용과 금방 연결되는 제목이었다.

현지 신문 광고를 보니 사정은 엇비슷했다. 우리처럼 영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영화 제목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웠다. '아이스 에이지'는 '빙원역험기(氷原歷險記)'로,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관건보고(關鍵保告)로, '로드 투 퍼디션'은 '비법정의(非法正義)'로 제목을 바꿔달았다.

또 '스타워즈 에피소드2:클론의 습격'은 '성제대전이부곡:복제인전면진공(星際大戰二部曲:復製人全面進攻)'이었다. 영어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에서 중국인의 자존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언어가 문화의 그릇이라는 점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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