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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0>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24. 허스키 보이스 3인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매혹의 골든 허스키 보이스'. 1960년대 나와 한명숙·현미씨를 함께 묶어 이르던 애칭이다. 당시의 잡지들도 그런 식으로 제목을 달아 '3자 모음' 화보 촬영에 열을 냈다.

한명숙과 현미씨는 극장 공연 등을 다니며 거의 매일 나와 같이 생활하다시피 한 '음악가족'이었다. 현씨는 작곡가·연주가인 남편 이봉조씨와 부부 싸움을 하면 그 자초지종을 나에게 죄다 털어놓았다. 그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였다.

한살 아래인 현씨는 나를 '미스터 최'라고 불렀고,나는 아이 애칭을 따 '돼지 엄마'라며 놀렸다. 나보다 한살 위인 한씨는 말수가 적고 조신한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씨에게 '한꼰대'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래도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현씨는 이와 대조적으로 스트레스를 쌓아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활달해 늘 생기가 넘쳤다.

한씨와 현씨 모두 평안도 출신 실향민이었다. 급하면 평안도 사투리가 진하게 튀어나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곤 했다.

나처럼 둘 다 미 8군 쇼를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 각각 '노란 샤쓰의 사나이'(61년)와 '밤안개'(62)로 당시 트로트 일변도인 가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주인공들이다.

한씨는 60년대 중반 성대에 이상이 생겨 가수 활동에 지장이 많았다. 최고의 전성기에 맞이한 불행이었다. 그래도 영화 '노란 샤쓰의 사나이'에 출연해 신영균과 호흡을 맞추는 등 다방면에서 끼를 보였다.

나는 가요 인생에서 몇차례 '여풍(女風)'을 경험했는데,한씨도 이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가 나온 뒤 파죽지세로 달려가던 때 한씨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나와 인기 가도에 슬쩍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하지만 상승작용을 하는 장점도 있다며 서로 격려해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씨의 또 다른 히트곡으로는 손석우 작사·작곡의 '우리 마을'이 있다.

"수양버들이 하늘 하늘 바람을 타고 하늘 하늘/물동이 이고 가는 처녀 치맛자락 하늘 하늘/푸른 호박이 주렁주렁 초가지붕에 주렁주렁/일하는 총각 이마에는 땀방울이 주렁주렁…."

말랑말랑한 의태어를 멋지게 사용한 이 곡은 건전가요로 애창됐다. 원래 한씨는 패티 페이지 노래를,속된 말로 끝내주게 불렀다. 그런 식의 느린 노래도 한씨가 부르면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런 걸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당시 현미씨의 불후의 대표작은 '밤안개'다. 외국곡을 이봉조씨가 편곡해 가사를 붙인 것이다. 번안가요인 셈이지만 현씨의 시원스런 목소리에 실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호쾌한 도입부가 압권이었다.

"밤안개가 가득히 쓸쓸한 밤거리/밤이 새도록 가득히 무심한 밤안개/임 생각에 그림자 찾아 헤매는 마음/밤이 새도록 가득히 나는 간다."

작곡가 이씨와는 50년대 말부터 부부였다. 미 8군 쇼에 출연하다 연을 맺었다. 현씨는 미 8군 쇼에서 여성 삼중창단인 현시스터스의 멤버로 활동했다. 가끔은 솔로로도 노래를 불렀는데,워낙 가창력이 뛰어나 미국의 웬만한 흑인 가수 뺨칠 정도였다. 흑인영가풍의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다. '밤안개' 이후 현씨는 '보고 싶은 얼굴''떠날 때는 말없이''애인''총각김치'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아무튼 우리 세 사람은 지방의 극장 공연도 자주 다녔다. 으레 포스터의 주인공은 우리 세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낭만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지방 공연길은 마치 구도자의 고행길 같았다.

우리는 광주에서 공연을 마치면 그날로 춘천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다음날 낮 12시30분 첫 공연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극장 공연은 낮 12시 무렵에 시작해 밤 늦게까지 네댓차례나 계속됐다. 택시를 타고 장시간 비포장길을 달려 극장 앞에 도착하면 다리를 펼 수조차 없었다. 그래도 그런 강행군을 무사히 치러낸 걸 보면 우리 모두 체력은 타고난 모양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가끔씩 소식을 주고 받으며 오누이처럼 지낸다. 아직도 방송 출연이다 뭐다 하며 활동력이 왕성한 현미씨를 보면 부럽기도 하다. 노익장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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