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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냐 조직이냐 애끊는 父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영화 '로드 투 퍼디션'(원제 Road to Perdition)은 제목부터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지옥·나락 등을 뜻하는 '퍼디션'이 그리 흔하게 쓰이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적 분위기가 물씬하다.

영화도 그렇다. 총질이 난무하는 갱스터류로 분류될 수 있으나 내용은 한편의 장편소설 같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 중 하나인 부자(父子) 문제를 파고든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그렇듯 '로드 투 퍼디션'의 아버지는 거의 완전무결하다.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희생자로 제시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묘사된 아버지상은 매우 중층적이다. '패트리어트''위 워 솔저스' 등에 나타난 멜 깁슨식의 영웅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개인적으론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으나 아들의 미래를 위해, 혹은 아들이 자신의 못난 점을 닮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30년대 美 대공황시대 배경

영화의 키워드는 '퍼디션'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생명의 위험을 피해 향하는 곳의 구체적 지명이자 아버지가 결국 파멸하고 만다는 함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반면 아들은 온갖 위험을 극복해가며 점차 아버지의 진심에 다가선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역설(패러독스)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최종역은 철저한 나락이 아니라 내일을 향한 희망인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장밋빛 전망은 아니더라도 과거를 인정하고 새로운 출발을 기약한다는 점에서 진취적이다.

'로드 투 퍼디션'의 감독은 작품상·감독상 등 2000년 아카데미 5개 부문을 휩쓸었던 '아메리칸 뷰티'의 샘 멘데스다. 연극에서 다진 기본기로 무장,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로 할리우드를 깜짝 놀라게 했던 멘데스는 예의 치밀한 구성력으로 1930년대 대공황 시절의 미국을 파헤치고 있다.

전작과 기조는 많이 다르다. '아메리칸 뷰티'가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 미국 중산층의 일상을 풀어헤친 '해체형' 영화라면, '로드 투 퍼디션'은 마피아란 철혈 조직 앞에서 분해되기 직전의 부자를 뭉치게 한 '결합형' 영화다. 그럼에도 그 봉합이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드라마 자체가 튼실하기 때문이다.

'로드 투 퍼디션'은 갱스터 영화의 ABC를 완비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두운 화면 속에 금주령 시대 미국의 혼란스런 사회상, 피도 눈물도 없는 마피아의 대결과 복수 등을 깔끔하게 배치했다. '대부''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의 대를 이을 만한 영화로 부를 만하다.

톰 행크스·폴 뉴먼 연기 대결

그러나 분명 차이는 있다. 조직 내 세력 갈등, 물고 물리는 조직간의 복수극 등 '사나이'의 세계에 초점을 맞춘 많은 갱스터 영화와 달리 '로드 투 퍼디션'의 관심사는 시종일관 부자관계다. 돌발적 살인사건을 목격한 아들을 조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진력하는 마이클(톰 행크스)의 분투가 처연할 정도다.

조직 두목인 루니(폴 뉴먼)의 양아들로 인정받았던 마이클이건만 아들의 생명을 위해선 그의 과거도 현재도 던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멘데스 감독은 자칫 신파조로 빠질 수 있는 영화를 두가지 장치로 건져냈다. 근엄하고, 예의 깍듯한 관계로 일관했던 마이클 부자가 서로의 속마음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중심에 놓고, 평소 말썽만 피우는 망나니 아들을 둔 조직 보스 루니 부자의 갈등을 곁가지로 놓으면서 여러 차원에서 인간관계를 음미할 수 있게 했다.

또 마이클과 그들을 추적하는 잔혹한 킬러 맥과이어(주드 로)를 대립시키면서 마피아의 냉혹한 논리와 아버지의 묵직한 사랑을 비교하게끔 한다.

조직의 2인자로서의 냉정한 면모를 유지하다가 피살된 가족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몸담았던 조직에 총을 겨누는 마이클의 곤혼스런 처지를 매끈하게 소화한 톰 행크스의 저력이 돋보인다.

특히 억센 비가 쏟아지던 날 마이클이 루디 일당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과 그가 바닷가에 노는 아들을 보면서 킬러의 총에 쓰러지는 장면은 갱스터 영화의 비장미를 유감 없이 전달한다.

너무 '멋진' 아버지를 내세운 게 아니냐는 불평도 예상되나 가슴을 진득하게 누르는 영화의 무게감을 감안할 때 심하게 꼬집힐 일은 아닌 듯하다. 1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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