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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 수십명 1년 군포 값 주자학 책은 양반 전유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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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양반들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아 조선을 통치했다. 성리학의 또 다른 이름은 주자학이다. 주자가 성리학의 집대성자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주자학의 이해에 가장 중요한 책은 무엇이었던가? 답은 간단하지 않다. 주자가 저술하거나 주해를 달거나 편집한 책은 수십 종에 달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서(四書)에 관한 재래의 주석을 비판적으로 정리하고 자신의 해석을 가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앞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주자를 이해하자면, 주자의 문집인 『주자대전』과 주자의 강의를 제자들이 노트한 『주자어류』를 빼놓을 수 없다.

주자학이 한국 땅에 들어온 것은 1300년 무렵이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였으니, 당연히 『주자대전』과 『주자어류』가 일찍부터 많이 간행되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정은 정반대다. 세종 11년 5월에 전국에 명을 내려 『주자대전』을 찾았더니, 한 달 뒤 안동에서 중국본 한질을 바치는 사람이 겨우 나올 정도였다.

중종 38년(1543) 김안국이 주관하여 95책이란 거질의 『주자대전』을 최초로 간행한다. 조선이 건국된 지 1세기 반이었고, 주자학의 전래 시기인 1300년경으로부터 2세기 반이었다. 주자학의 나라에서 주자의 문집 간행이 이토록 늦어진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 책은 오자가 많았다. 『주자대전』은 선조 때 와서 유희춘이 교정과 출판을 주관하여 1575년에 재간행된다. 『주자어류』 역시 같은 해에 간행되었다. 이 『주자대전』과 『주자어류』가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여기서 내가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두 책의 발간 역사가 아니다. 나는 이 책의 값에 대해 말하고 싶다. 유희춘은 자신의 일기(『미암일기초』, 1576년 6월 25일)에다 자신이 주관하여 발간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가 교정이 잘 되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고, 오승목(五升木) 1동(同)으로도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자랑스럽게 쓰고 있다.

오승목 1동이 『주자대전』을 값만을 지적하고 있는지, 『주자어류』까지 포함한 값인지는 약간 모호하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격이다. 오승목은 품질이 중등 정도가 되는 무명이다. 길이는 35척(尺)으로, 1척을 30㎝로 잡으면 약 10m쯤 된다. 오승목은 중간 품질이기 때문에 뒷날 국가에서 징수하던 군포의 기준이 된다. 1동(同)은 면포 50필이다. 즉 오승목 50필을 주어도 사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오승목 50필은 어떤 정도의 무게를 갖는 가격인가? 임병양란이 끝나고 정부는 양인들에게 군역을 지지 않는 대신 1년에 군포 2필을 내게 했는데, 이것은 너무나 가혹한 부담이었다. 군포 2필을 내지 못해 자살하는 자, 야반도주하는 자가 속출하자 정부에서는 젖먹이 아이에게도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징수했다. 국사 시간에 배운 이른바 황구첨정이니 백골징포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군포가 사회문제가 되자 1750년 균역청을 설치하고 2필을 1필로 감축했으나, 이마저 역시 농민이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상상이 되는가? 『주자대전』 『주자어류』의 값 오승목 50필은, 1750년 이전이라면 양민 25명의 1년 군포의 양에 해당하고, 1750년 이후라면 50명의 군포의 양에 해당한다. 끔찍한 가격이 아닌가?

서양 중세의 성경이 오로지 교회나 성직자의 것이었듯, 조선의 주자학 서적은 극소수 부유한 양반들의 소유물이었다. 부유한 양반이 아니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책이었다. 지식의 독점은 권력의 독점과 통한다. 조선의 양반은 한없이 높은 책값으로 조선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정보와 지식이 홍수를 이룬다는 인터넷 시대다. 하지만 싸구려 지식과 정보는 넘치고, 정작 알짜배기 지식과 정보는 소수가 독점하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자대전』을 보고 다시 생각해 본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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