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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혐오하면서 비밀 영역 확장, 민주주의 미국의 역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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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호 11면

미국 정부의 비밀 분류에서 ‘1급 비밀’은 공개했을 때 국가 안보에 ‘예외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정보를 의미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뿐만 아니라 26만5000명의 민간인이 ‘1급 비밀’을 다룰 수 있다. [중앙포토]

미국인들이 거짓말만큼 싫어하는 것은 비밀이다. 나쁜 일이 벌어지면 비밀주의가 단골 원인으로 지목돼 집중 공격을 받는다. 미국 언론은 비밀주의나 ‘비밀주의 문화(secrecy culture)’를 미국·유럽의 금융위기, 도요타자동차의 리콜 사태, 애플이 출시한 아이폰4의 안테나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거론했다. 월마트는 매출 데이터를 소비자단체들에 공개하지 않아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1급 비밀 취급자 85만 명, 미국의 비밀주의

정치 영역에서도 비밀은 미국적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인식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privacy)를 사수하려는 미국인들이 ‘국가의 프라이버시’라고 할 수 있는 국가 기밀은 부정적으로 본다. 미국인들에게 비밀의 반대말은 공개성(openness)이자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와 비밀은 양립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공존한다.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해 온 미국인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진 기사가 최근 워싱턴 포스트(WP)에 실렸다.

다나 프리스트(2008년 풀리처 상 수상자)와 군사·안보 전문기자·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아킨은 ‘1급 비밀 미국(Top Secret America)’이라는 대형 기획 연재기사를 19~21일 내놨다. 10여 명으로 구성된 탐사보도팀은 2008년 8월 취재에 착수해 수백 명을 인터뷰하고 수십만 건의 자료를 뒤졌다. 기사에 따르면 9·11테러 이후 대(對)테러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미국은 통제 불능한 ‘비밀 제국’이 됐다. ‘비밀 제국’의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 미국 정부가 ‘비밀 분야’에서 돈을 얼마나 쓰고 있는지, 고용된 사람이 몇 명인지, 어떤 비밀 관련 프로그램이 몇 개나 진행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 ‘비밀 제국’은 지난해 성탄절 항공기 폭파 기도 사건이나 13명의 사망자를 낸 포트 후드 미군기지 총기 난사 사건을 막지 못했다. 국방부·중앙정보국(CIA) 등 정보 취급기관 간의 비협조와 권력 투쟁, 업무 중복이 효율성 저하 원인으로 지적됐다. 민간 기업 종사자들이 정부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도 문제점이다. 미국 정부의 비밀 분류체제에서 3급 비밀(confidential), 2급 비밀(secret), 1급 비밀(top secret) 중 1급 비밀을 다룰 수 있는 민간인이 26만5000명이나 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1급 기밀 취급 인가가 있는 사람도 모든 1급 기밀을 다룰 수 없다. 따라서 26만5000명의 민간인이 미국의 모든 1급 비밀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수적인 규모가 예상 밖이었다.

‘1급 비밀 미국’은 탐사 저널리즘의 역작으로 9·11테러 이후 국가 안보와 자본주의가 결합해 생성된 ‘국가안보자본주의’의 실체를 파헤쳤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무반응이나 “새로운 내용이 없다”는 시큰둥한 반응도 많았다. 존스홉킨스대 교환교수인 토머스 망컨은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에 실은 글에서 “대학원 논문이라면 F를 주겠다”고 했다. 기사의 논제가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 지명자는 20일 상원 정보위원회의 인준청문회에서 ‘1급 기밀 미국’이 “일화(逸話)에 바탕을 둔 선정주의적 기사”라며 특히 업무 중복은 ‘경쟁적 분석(competitive analysis)’을 위해 일부러 설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사가 국가안보에 미칠 수 있는 악영향도 문제시 됐다. 기사 웹사이트(topsecretamerica.com)에 “미국의 적들이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나와 있다”는 것이다. ‘모자이크 이론(mosaic theory)’을 인용한 우려도 있다. 조각 하나하나는 국가 안보에 무해한 내용이더라도 조각을 모은 모자이크는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기사들은 전적으로 공개된 자료에 의존했으나 기사가 그린 ‘전체 그림’은 기밀로 분류할 만한 내용이라고 평가됐다.

‘1급 기밀 미국’은 잔잔하지만 의미 있는 파장을 일으켰지만 태풍급 파문은 없었다. 왜일까.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가 그만큼 변화했다. 국민의 ‘알 권리’와 국가 안보 사이에서 고민하던 미국이지만 국민을 테러로부터 보호하는 게 시급해졌다. 민주주의와 비밀의 관계에서 중대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어떤 변화가 있는지 역사를 들여다보자. 유럽에서는 국가가 민주주의 태동 이전에 존재했다. 유럽의 국가는 국가이성(國家理性)에 입각해 움직였다. 국가이성은 “국가가 국가를 유지·강화해 가는 데 필요한 법칙·행동기준”을 말한다. 법칙·행동기준에는 비밀이나 기만도 포함될 수 있다. 건국 당시부터 민주국가로 출범한 미국에 국내·국제정치를 막론하고 비밀은 체질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미국 또한 국제사회에 만연한 비밀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냉전 중에도 미국은 린든 B 존슨 대통령 시절에 정부가 관리하는 정보·문헌의 공개를 요구할 수 있는 ‘정보자유법(FOIA·1966년)’을 마련했으나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정보에 대해서는 예외 규정을 두게 됐다. 냉전이 비밀을 정당화한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정부의 공개성·투명성·책임성을 강조해 왔다. 실천이 쉽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9일 대통령 명령 13526호로 정보 공개 대상을 소급해 기밀 문서화할 수 있도록 했다.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CJR)’는 최근호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부시 행정부보다 개방성 면에서 후퇴한 감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컨대 지난해 7월에서 올해 5월까지 대통령 기자회견이 한 번도 없었다.

비밀은 국가 안보의 필요악(必要惡), 나아가 민주주의 작동을 위해 있어야 하는 필요선(必要善)이 될 수 있는가. 뉴욕에 있는 뉴스쿨(New School) 대학에서 5월에 민주국가에도 지켜야 할 비밀이 있는가를 주제로 ‘민주국가의 지식 제한’이라는 학회가 열렸다.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가르치는 석학들이 모인 학회였지만 뾰족한 학문적 해결책이 없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어떤 비밀들은 지금 방식으로 유지하는 게 좋다. 다른 비밀들은 불필요하다.”

‘1급 비밀 미국’에 나타난 미국에서는 비밀이 지금 방식으로 유지되지 않을 것 같다. 국가안보국(NSA)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수학자를 고용하는 기관이다.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 기업들도 미국의 ‘최첨단 비밀 산업’에 참가하고 있다. 미국은 비밀 처리 분야에서 경계를 넓히고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개방성은 비밀주의를 탈피하고 있지 못하는 나라들과 경쟁할 때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지적돼 왔다. ‘1급 비밀 미국’의 부상은 미국의 비밀 처리 능력이 계속 발전한다면 미래에는 국가 경쟁력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이 어느 길을 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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