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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오구’ 무대 다시 서는 강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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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선생님, 저 연극하는 이윤택입니다.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1997년이었다. 어느 날 날아온 전화 한 통에 탤런트 강부자(69)씨는 약속을 잡았다. 장소는 여의도의 한 커피숍. 이윤택(58) 연출가와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나이는 10년 아래였지만 그래도 당대 최고의 연출가 아니던가.

연출가는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 무조건 해주셔야 합니다”라고는 봉투를 턱 꺼내놓았다. “그게 뭐에요?” “출연료입니다.” 액수는 무려 1000만원. 당시로선 거금이었다. 연출가는 또 “얼마 전 꿈에 할머니가 나타셨습니다. ‘강부자 말고 할 사람 없다’고 하셨어요”라고 몰아붙였다. 작품이 뭔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강씨는 뭐에 홀린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굳이 그렇다면….”

강부자씨가 연극 ‘오구’ 무대에 6년 만에 선다. 연극배우 강부자를 각인시킨 작품이다. 아흔까지 연기를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김형수 기자]

◆죽음도 잔치다=13년 전 강부자씨가 얼떨결에 출연키로 했던 연극은 바로 ‘오구’다. “막상 하기론 했지만 대본 읽어 보곤 영 내키지 않더라고. 늙은 어머니가 죽어간다는 얘기는 찜찜하고, 죽었으면 곱게 있지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이상하고, 흉측한 분장의 저승사자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근데 진짜 연습 들어가고 자꾸 읽다 보니 그게 아닌 거야. 아, 죽음이 끝이 아닐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

첫 무대는 400석 규모의 서울 정동극장이었다. 익히 알려진 작품에 친숙한 배우까지 나오자 객석은 꽉꽉 들어찼고, 표를 못 구해 돌아가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공연이 올라갔다. IMF 외환위기 여파로 경기 상황이 나쁜 때였지만 ‘오구’는 공연 20일 만에 티켓 판매 수입 1억2000만원을 기록할 만큼 대성황이었다. 윤석화의 ‘신의 아그네스’, 손숙의 ‘어머니’에 이어 강부자의 ‘오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뭐 한 게 있나. 작품이 좋은 거지. 우리가 늘 죽음은 두렵고 무서운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오구’에선 익살스런 표정과 몸짓으로 그려. 죽음에 대한 거리감을 없앤다고 해야 할까. 우리 민족 DNA엔 그런 해학적 정서가 있는 거 같아.”

◆“연하남과 사랑 연기 하고파”=막상 가까이서 보니 칠순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강씨는 고왔고, 피부도 깨끗했다. “아마 한국 여배우 중 귀 안 뚫은 사람 저밖에 없을 걸요. 그만큼 부자연스러운 게 싫어.”

강씨는 1962년 3월 KBS에 공채 탤런트로 입사했다. 그 해 10월엔 ‘청기와집’이란 연극을 했는데, 마님 역이었다. 2년 뒤 TV드라마에선 자기보다 스물다섯 많은 고(故) 김동원(1916~2006) 선생의 어머니 역을 했단다. 그때 손녀 역이 열한 살 연상의 고(故) 도금봉(1930~2009)씨였다고. 꽃다운 20대 초반 때부터 이른바 ‘마님 전문 배우’였던 셈이다. 나이 든 역만 하는 게 서운하지 않았을까. “어때. 그 덕분에 이렇게 오래 연기할 수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그토록 친숙한 연기자임에도 강씨가 멜로 연기를 한 기억은 별로 없다. “중후한 멋의 연하남과 애틋한 사랑 연기를 하면 멋지지 않을까 싶은데. 어차피 전 아흔까지 연기할 생각이에요. 앞으로 20년 안에 그런 기회 있지 않겠어?”

▶연극 ‘오구’=30일부터 호암아트홀. 4만원, 6만원. 02-501-7888.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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