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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영화는 당신의 꿈마저 훔쳐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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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인셉션’은 창작자의 어마어마한 야심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영화다. ‘남의 꿈에 스며들어 기억을 훔친다’는 SF적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 안에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포개놓는다. 마치 관객의 지능지수와 집중력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꿈 속에서 또다른 꿈을 꿀 수 있고 다시 그 속에서 다른 꿈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설정은 보여주기도, 보고 소화하기도 수월치 않은 설정이다. 10여 년 전 ‘매트릭스’가 시도했던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적 세계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더욱 깊어지면서 동시에 오락적인 외연이 확장된 보기 드문 영화다.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10억 달러를 거둬들였던 ‘다크 나이트’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셉션’에서 무의식이 빚어낸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야심차게 펼쳐보인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는 ‘다크 나이트’‘배트맨 비긴즈’‘메멘토’의 크리스토퍼 놀란(40).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2억 달러(약 2400억원)짜리 블록버스터 ‘인셉션’은 ‘재난’으로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놀란은 데뷔작 ‘메멘토’에서 ‘같은 이야기의 다른 반복’이라는 주제를 성공리에 테스트했고,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를 거치며 블록버스터를 지휘하는 법을 터득했다. ‘인셉션’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촉망받는 상업영화 감독으로 우뚝 선 그의 노하우와 야심이 농축된 프로젝트다.

돔 코브(리어니도 디캐프리오)는 남의 머릿 속에 들어가 생각을 훔치는 기술자다. 하지만 그는 아내 맬(마리온 코티야르)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 도망자 신세다. 그에게 사이토(와타나베 겐)가 접근한다. 굴지의 재벌기업 후계자의 머릿 속에 생각을 심어 기업 합병을 막아달라는 제안이다. 대가도 달콤하다. 돈은 물론 수배도 풀리게 해 아이들 품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것. 돔은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 아서(조셉 고든-레빗), 임스(톰 하디) 등을 모아 꿈의 설계와 실행에 들어간다.

열여섯살 때부터 품었던 구상이라서일까, 놀란이 그려낸 설계도는 상당히 정치하다. 꿈에서 깨는 방법이자 물리적 충격인 ‘킥’, 꿈에서 잘못 깨어나게 되면 빠지는 무의식의 세계 ‘림보’를 비롯해 꿈과 현실을 구분해주는 장치인 ‘토템’까지 어느 설정 하나 허투루 쓰이는 게 없다. 아마도 이런 설정을 미리 알고 간다면 영화의 맛을 훨씬 더 깊이 음미할 수 있을 듯하다.

‘매트릭스’가 총알 피하는 슬로우모션 장면으로 액션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면, ‘인셉션’은 호텔에서 벌어지는 무중력 액션 신으로 액션영화사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다. 거리가 종이 접히듯 접히고 건물 유리창이 카드 섞이듯 튀어나와 휘날리는 대목과 더불어 ‘꿈에선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는 가정을 이만큼 잘 구현하기도 쉽지 않을 듯. “제임스 본드(007)가 ‘매트릭스’를 만난 것 같다”(미국 영화평론가 피터 트래버스)는 식의 평이 쏟아지는 것도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인셉션’이 정말로 뛰어난 이유는 범죄스릴러와 SF액션 안에 녹여낸 생각거리 덕분이다. 돔과 맬을 얽은 후회와 집착의 드라마는, 이 지적인 블록버스터에 감성적인 이완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분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인간이 꿈에 집착하는 이유는 현실이 너무 참혹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현실을 외면하려는 맬과 그런 아내를 돌이키려 하는 돔의 비극은 가까운 미래가 아니라 21세기 지금 여기에 대입해도 큰 무리가 없어보인다.

‘매트릭스’가 그랬듯 ‘인셉션’ 역시 이게 맞다, 아니다를 놓고 왕성한 설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주연배우 디캐프리오는 이렇게 옹호한다. “나도 처음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보고 나서 아무런 토론이 없다면 솔직히 형편없는 영화 아닌가”(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 그런 점에서 ‘인셉션’은 오랜만에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다. 21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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