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세'대화무드'급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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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1일의 브루나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회의의 지역문제 화두는 한반도 정세였고, 그 결과는 긴장완화와 대화였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백남순(白南淳) 북한 외무상이 15분 동안 회동한 것은 우리 정부도 뒤늦게 안 깜짝쇼였다. 그것도 "북한에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해온 미국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후 북·미간 최고위급 만남이 이뤄진 의미는 크다.

남북 외무장관은 따로 만나지는 않았지만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두 장관의 기조연설 공통분모는 대화를 통한 남북관계 진전이었다. 북측은 우리측이 제기한 서해교전 재발 방지 등에 응수하지 않았다. 서해교전이 남북관계의 뒷다리를 잡는 상황은 가시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정세 안정 궤도로=이번 ARF를 계기로 한반도 정세는 안정 궤도로 들어갔다. 남북이 장관급회담 실무접촉에 합의한 가운데 북·미, 북·일 양국이 외무장관 회담에서 각각 미국 특사 방북에 사실상 합의하고, 이달 중 외무성 국장급 회담을 열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 정세는 남북 장관급회담, 미국 특사 방북, 북·일 국교정상화 문제 협의라는 전면 동시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대북 강경정책을 들고나온 부시 행정부 출범 이래 한·미·일 3국과 북한간에 이같은 화해 분위기가 조성된 적은 없었다.

뿐만 아니다. 남북이 ARF를 전후해 중국·러시아와 잇따라 교차회담을 연 것도 정세 안정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경제개혁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이번 ARF에서 전방위 외교 자세로 나온 것도 고무적이다.북한의 경제개혁과 대외 유화정책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미국 특사 방북 시간문제로=파월-白외무상 회동은 북·미 공식 대화의 보증수표라 할 수 있다. 양측이 고위급 접촉에서 대화에 원칙적으로 합의한 만큼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방북은 날짜만 남겨놓게 됐다는 지적들이다. 白외무상이 "조·미 회담 재개에 합의했다"고 공언한 점도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특사의 급은 이번에 외무장관 회동이 이뤄짐으로써 차관보급에서 한단계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북·미간의 급속한 접근에 대해선 우리 정부도 적잖이 놀라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북·미관계가 곧바로 큰 진전을 볼 것으로 단정키는 어렵다. 미국이 의제로 삼는 미사일 확산 금지, 제네바 핵합의의 이행 개선, 재래식 무기의 감축은 모두 북한의 양보가 필요한 것들이다. 게다가 북한은 미국의 대북정책이 적대 정책이라고 의심하고 있고, 미국측이 제시한 의제가 전제조건이라는 입장이다. 이는 白외무상의 ARF 연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속도 붙는 북·일관계=북·일 양국이 이날 이달 중 외무성 국장급 회담에 합의한 것은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국교정상화 교섭은 국장급 이상의 고위급에서 이뤄져 왔지만 양측은 이날 공동발표문에서 이 회담이 "국교정상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양국 관계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당장 일본은 북한에 식량을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북한은 과거 청산과 관련한 일본의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납치문제 의혹 해소에 나설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유럽연합(EU)·호주·태국·브루나이를 상대로 한 북한의 실리 외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白외무상은 북한에 식량지원을 하고 있거나 한 적이 있는 이들 나라 외무장관과 만나 경제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루나이=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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