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대담한 개방노선 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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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브루나이에서 어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 회의장은 북한의 대남 및 대외 노선이 상당히 변화했음을 감지토록 한 현장이었다. 북한 백남순 외무상은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과 전격 회동한 데 이어 회의장에서 최성홍 외교통상부 장관과 파월 장관이 서해교전의 북측 도발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음에도 이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종전 같았으면 미국의 사주에 의한 남한 도발이라고 맞받아쳤을 것이다. 그 대신 白외무상은 남북 간 대화와 협상을 통한 공존관계 및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북한이 고립 탈피를 위한 개방 노선을 밟고 있다는 징조는 서해교전에 대한 사과 표명과 함께 남북 장관급 회담의 재개를 요청하면서 보였다. 북한은 서울에서 열릴 8·15 남북 공동행사에 민간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고, 북측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이 김운용 IOC 위원에게 남북 체육회담을 제의해 가을 부산 아시안게임에 북한팀 참가를 시사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도 브루나이에서 북·일 외무장관 회담 개최에 합의하는 한편 방북할 미국 특사의 격에 구애받지 않겠다고 하는 등 유연성을 보였다. 그래서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18개월 만에 처음으로 북·미 외무장관 회동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북의 경제 개혁 추진과 때맞춰 나왔다는 점에서 한시적 현상이 아니라 대외 개방 노선을 본격화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의 새로운 노선이 국제 사회의 지지와 동정을 받아 파탄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절실히 필요한 대외 원조와 투자유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선 우선 대남관계를 더욱 폭넓게 개선해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가 먼저 풀려야 미국의 대북 신뢰가 형성된다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일관된 메시지다. 북한이 대미관계 개선을 위해 남한을 들러리로 이용해 온 과거의 행태가 재연된다면 남한은 물론 미국도 잃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북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의지는 현실적으로 남한밖에 없다.

북한은 또 대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선 미국의 최대 관심사인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문제 등에 대해 양보할 건 양보하고, 받을 건 받는다는 원칙 아래 구체안을 마련, 제시해야 한다. 또다시 벼랑 끝 협상술로 버틴다면 북·미관계는 급랭할 것이다. 북·미관계가 풀려야 여러 나라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 정부도 이젠 북한에 대해 '될 것'과 '안될 것'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북·미 간 협상을 뒤에서 조용히 돕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미국도 북한이 당장 수용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전제조건을 붙이지 말고 유연한 자세로 북한을 대해야 한다. 북한이 새 노선을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데 도움을 줘야 '북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한반도 안정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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