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지고 사는 바닥인생 그래도 철학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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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참으로 무던히도 많이 맞았다. 영화 속의 그를 보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절로 들고 때론 불쌍하기까지 하다. "저렇게 살아야 하나" 라는 동정도 인다.

배우 이문식(38)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맞은 매만 세도 열 손가락·열 발가락이 모자라건만, 그런데도 그는 울지 않는다. 오히려 히죽히죽 웃는다.

어떻게 보면 덜 떨어진 것 같고, 또 다시 보면 뭔가 꽉찬 듯하다. 단 하나 확실한 건, 그가 결코 밉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게 이문식의 매력이다. 그만큼 정감이 가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3류인생役 1류연기로 빛내

영화 속의 그는 분명 불행했다. 최근작만 따져보자. '공공의 적'에서 의자에 꽁꽁 묶여 강력계 형사 설경구로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주류 도매업자,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택시기사 이혜영에게 시비를 걸다 경찰서까지 끌려가는 취객, '일단 뛰어'에서 개에게 물려 담에서 떨어지는 어리숙한 강도가 바로 그다.

지난주 개봉한 '라이터를 켜라'에선 양아치 두목 차승원에게 뒷머리를 맞고, 당찬 아가씨 김채연에게 빰을 맞고, 그것도 모자라 기차 승객에게 집단으로 밟힌다. 그도 이젠 맞는 데는 도를 통한 모양이다.

"절대 맞는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연기일 뿐이죠. '공공의 적'에서 설경구에게 숱하게 맞았지만 결코 아프지 않았어요. 그만큼 극에 몰입한 까닭이겠죠. '라이터를 켜라'에선 차승원에게 단 한번 맞았는데, 긴장을 안해서인지 정말 아프더라구요."

헛웃음이 터진다. 나이 마흔을 코 앞에 둔, 작은 키에 이리저리 흩어진 곱슬머리,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 등 배우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죠. 저도 영화배우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제 얼굴에 무슨 햇살이 들겠어요"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문식은 분명 영화배우, 그것도 요즘 충무로에서 1순위로 찾는 조연이다. '라이터를 켜라'의 시사회가 있던 날, 관객들은 주연 배우 차승원과 김승우보다 그에게 더 많은 박수를 보냈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영화가 있었을까 하는 과장된 물음을 던질 만큼 그는 분명 주연 이상으로 빛났다.

'달마야 놀자'에서 조폭 박상면과 잠수 시합을 벌였던 대봉 스님, '봄날은 간다'에서 녹음기사 유지태의 선배, '선물'에서 이영애의 초등학교 동창 등이 그의 또 다른 필모그래피(출연작)다. 그로선 정말 분주하게 보낸 지난 1~2년이었다.

코미디 배우 굳어질까 두려워

"운이 좋았어요. 한 게 뭐 있나요. 다 좋은 작품을 만난 탓이죠. 영화 속 캐릭터 때문에 좋은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일이 안 풀리는 2류, 3류 인생을 주로 맡았죠. 아무리 발버둥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그런 가련한 인생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그의 철학은 절대 계산을 하지 말자다. '공공의 적'의 주류 도매업자 산수는 셈이 워낙 빠르지만 정작 자신은 수학·통계학이 싫어 항공대 경영학과를 포기했단다. 그리고 연극영화과에 들어가면 탤런트가 된다는 친구의 말만 듣고 덜렁 한양대에 입학했다. 계산 대신 그가 선택한 전략은 '이해'다. 맡은 배역의 마음 속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고 말했다.

"주로 코미디 영화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웃기겠다고 생각한 적은 전혀 없어요. 그 상황에서 그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궁리했습니다. 30대 후반에 든 제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과장된 몸짓을 하겠습니까. 그랬다면 개그가 됐을 겁니다. 또 모자랐다면 썰렁한 영화가 됐겠죠. 그래서 항상 칼날 위에 선 심정으로 연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도 영화처럼 꼬였다고 했다. 시골집에서 삯바느질하는 홀어머니 몰래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고, 제대 후 대학로 연극판에서 배를 곯며 지내고, 심지어 수년 전까지도 어머니에게 용돈을 타 쓰고 등등. 이제야 겨우 불효자식 신세에서 벗어났다고 잠시 눈가를 훔쳤다.

이문식은 지금이 기회이자 위기라고 말했다. 자칫 코미디 전문배우로 '낙인'이 찍힐까 두렵다는 것. 그간 순박한 외모 덕을 봤다면 앞으론 그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철두철미 냉정한 킬러, 혹은 악랄한 사기꾼 등 성격파 배역을 찾는다고 했다. 진짜 사기꾼처럼 생긴 사람은 절대 사기를 칠 수 없다는 신조가 있기에 그렇게 먼 꿈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예컨대 '유주얼 서스펙트'의 케빈 스페이시나 '공공의 적'의 이성재 같은 역할이다.

"다작인 것 인정합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가끔씩 연극 무대 때의 열정을 잊고 관성에 빠지진 않았는지 경계합니다. 3년 전만 해도 오늘 같은 날을 절대 상상할 수 없었거든요."

TV드라마는 당분간 사절

그래서 그는 아직 TV드라마 출연을 거부한다고 했다. 영화 속과 비슷한 배역만 들어오기 때문이다. 굶어도 배우를 하겠다며 이를 악물었던 대학로 시절을 인생의 자양분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붙었다. 자식 노릇도 못했던 어머니에게, 그리고 어려웠던 시절 그를 음양으로 도와주었던 대학교 은사 최형인 교수에게 고개를 들 수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게다가 연극 후배와 결혼까지 약속했으니…. 그간 고생한 만큼, 또 삶의 매운 맛을 안 만큼 연기력을 키워 반드시 존경받는 배우가 되겠다는 다짐이 다부지다.

글=박정호,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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