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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을(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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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을(乙)'은 갈지자형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사물이 원활히 나아가지 않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을은 '둘째'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갑(甲)'에 이어 십간(十干)의 둘째 자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중국 문명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는 황제(黃帝)가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원리로 하늘로부터 받은 게 십간 십이지라고 한다.

세상살이를 갑과 을의 수직적 관계로 보는 사람이 많다. 힘 있는 쪽이 갑이고, 상대적으로 약세인 쪽이 을이다. 고용자와 피고용인, 집주인과 세입자, 직장에서의 상하 관계 등이 갑과 을의 상황이다. 공무원과 일반인, 정부와 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의 관계도 갑과 을로 해석된다. 공무원으로 일하다 일반 기업으로 옮기면 갑과 을의 관계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강력한지 실감하게 된다고 한다.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일하다 민간기업으로 옮긴 한 친구는 갑과 을의 위치 역전에 적응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고 실토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대립 구조와 완승 문화도 갑과 을의 수직적 역학 관계에서 비롯된다. 갑은 을에 대한 배려 없이 모든 것을 차지하려 하고, 이 때문에 을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갑의 위치에 올라서려 한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조된 단어 중 하나가 '상생(相生)'이었지만, 극한 대립으로 얼룩진 곳이 더 많았던 것도 이런 관계 때문이다. 타협의 예술이 중시되는 정치에서조차 상대방을 짓밟겠다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동양 철학에서 갑은 '양(陽)'을, 을은 '음(陰)'을 나타낸다. 양은 강함을, 을은 부드러움을 뜻한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세상이 시끄러워진다. 마찬가지로 갑이 을을 배려하고 을은 갑을 존중하는 수평적 관계가 정립될 때 세상이 평화로워진다.

동양의 역법(曆法)에서는 '갑'자로 시작되는 해가 가장 앞서지만, 서양 역법과 합쳐지면서 '갑'자 해는 4로, '을'자 해는 5로 끝나는 해가 되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조용하게 넘어간 해가 드물지만, '을'자 해에는 국운(國運)을 좌우한 일이 많았다. 100년 전인 1905년 한일합병을 불러온 을사조약이 체결됐고, 60년 전인 을유년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 처음 맞는 을유년이다. 올해는 '을'의 부드러움을 살리고 갑 못지않게 을이 존중받는 '을'의 해가 돼 우리 사회가 새로운 해방을 맞았으면 좋겠다.

이세정 경제부 차장